박혜영
유쾌한 즉흥성과 구도(求道)적 진지함을 혜영이 만큼 자신 안에서 잘 균형을 이루어낸 사람도 드문 것 같다. 혜영과는 독일에서 있었던 친한 지인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났다. 프랑스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그녀에게서는 상큼하고 발랄한 기운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녀가 있는 공간에서는 에너지가 춤추듯 흘러가는데 공기마저 그녀를 비타민제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토록 명랑한 혜영이가 그려내는 작품세계는 가장 근원적인 내 안의 두려움들을 소환해내어 정직하게 마주하도록 만들어주는 깊이의 힘이 있다.
정체성과 소통은 내 삶의 구석구석까지 퍼져있는 숙제이다. 관계에서 내 안에 정제되지 않은 날것부터, 틀에 담을 수 없는 찌그러진 모습부터, 미래형으로 존재하는 내 모든 비참함의 ‘가능성’ 마저도 ‘먼저’ 보여주곤 한다. 사회적으로 가장 받아들여지기 힘든 지점부터 이해 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런 저도 받아들여질 자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관계의 시험대에 올려보는 것 같다. 이해 받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놓고 온전히 이해 받지 못한다고 좌절감을 느낀다. 그러한 나에게 혜영이의 작품 한 점은 내 심장을 꼬옥 안아주며 이러한 두려움을 이해한다고, 거기에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고 다독여주었다.
혜영이와 하이퍼미디어를 공부하는 그녀의 파트너 로빈이 함께 만든 작품 중에는 관람객이 화면 위에서 그려지는 선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 그리도록 하여 함께 완성하는 쌍방향의 작품이 있다. 혜영이가 성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의 흐름에 손을 내맡겨 그려낸 작품이다. 벽면에는 빔프로젝터가 투사되어 혜영이의 손에서 작품이 그려지는 과정이 그대로 재현된다. 그런데 관람하는 사람은 제아무리 철저하게 화면이 제시하는 선의 흐름을 따라가보려 하더라도, 작가의 손끝에서 나온 선의 흐름과는 완벽하게 일치할 수 없다. 그리는 선이 약간은 어긋나고, 약간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혜영이가 그려낸 작품은 의식적인 세계를 반영한 것이기 보다는 무의식적인 흐름을 종이 위에 그려낸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의식의 눈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깊이까지도 표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도 내 안에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날것들부터 어떻게 해서든 표현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나의 사회적인 정체성과 스스로도 끊임없이 발견해가는 고유한 나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든 줄여보고 싶은가 보다. 화면 위에 그려지고 있는 선을 대면하고 있는 누군가는 그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기에 큰 그림은 비슷하게 나오지만, 세부적인 선은 조금씩 다를 수 밖에 없다. 결국 보다 참된 나를 담아 건네는 소통이란 이런 모양이고 이런 불완전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결국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 어긋남이, 삐죽 나간 선들이 삶의 절망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결국 그러한 ‘한계’ 때문에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간극, 이 애매함, 이 긴장 덕분에 삶은 답을 제시하는 모조품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리라.
한번은 죽음을 주제로 한 혜영이의 작품에 참여한 일이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인터뷰를 모아 만든 작품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혜영이가 보내온 메시지를 읽고는 가슴 따뜻한 울음을 터뜨렸다. 아름다운 마지막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그 순간이 올 때 자신도 내 곁에 있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고, 그리고 그 ‘따뜻한 마지막 순간
이 새로운 삶의 목표가 되길!’ 바란다고. 느낌표까지 찍어가며 죽음에게도 발랄한 생명력을 입히는 혜영이는 내게 ‘완성’을 위한 ‘한계’, 그 아름다움을 알려준 예술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