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수녀님
필립 퍼킨스의 ‘사진강의 노트’라는 책에서 ‘네오토니’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네오토니란, ‘분명히 생물학적 성장이 끝났는데도 의식 안에서 호기심, 상상력, 장난치기,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의 욕구들 같은 초기 성장 단계를 여전히 밟아나가며, 어린 시절의 감성과 환상들을 그대로 간직한 어른을 은유적으로 지칭하는 생물학적 용어이다.‘ 그리고 이는 긍정적인 징후라고 한다. 숱한 시련을 겪은 어른이 된 후에도 두려워하기보다는 모험하고, 대답하기보다는 질문하고, 방어하기 보다는 내어주는 ‘젊은’ 어른일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일이 아닌가? 내겐 60세의 프란체스카 수녀님이 그러한 분이다.
수녀님과는 3년 전쯤 한국애니어그램연구소에서 애니어그램 기초과정을 들으며 만나게 되었다. 왠지 모르게 말을 건네고 싶게 만드는 인연의 끈에 이끌리어 다가가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는 반가움을 넘어선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나보다 두 배의 세월을 살아오신 분과 이토록 자연스럽게 ‘통’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새로웠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 수녀님은 젊은 나이에 수녀님이 되셨다. 어두운 시대 속에서 희망을 믿고 따라가는 길 위에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만난 것이다. 그렇게 아무도 가톨릭 신자가 없는 집안에서 수녀가 되셨다. 흔히 수도자를 떠올리면 세상을 등진 사람들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여러 수도자들을 알게 되면서 깊이 느끼는 바이지만, 그들은 세상과 벗하고 세상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수도자의 길을 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녀님도 마찬가지이다.
수녀님은 가톨릭의 틀을 구성하고 있지만, 그 틀이 생명력을 빼앗아가는 틀이 되지 않도록 매번 새로운 창문을 만드는 분이다. 일반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쓰는 수녀들을 만날 때 가끔은 우리가 너무 착한 것이 문제라고 대담하게 말씀하시는 분, 때로는 길상사의 침묵의 집에서 묵언수행을 하시는 분, 한국 민간신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수녀 베일을 벗고 금화당 (만신 김금화의 집)을 탐방하시는 분, 신부는 미사 사전 준비를 하면 안되다는 관습에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 그리고 정치와 예술, 역사와 종교에 대해 끊임 없이 질문하고 배움으로써 변화하는 세상과 호흡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 그렇기 때문에 수녀님은 ‘물’의 세계와 ‘영’의 세계 어느 쪽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그 두 세계 사이를 너무나,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가는 분이다.
이러한 수녀님이기에 당연히 주변에 젊은 친구들이 많다. 나 역시 수녀님과 나의 관계를 친구로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수녀님으로 인해 내겐 ‘친구’라는 단어가 참 다채롭고 입체적인 얼굴을 갖게 되었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왔기에 더 잘 안다고 주의와 충고를 주는 어른이 아니라, 더 많은 세월을 보냈기에 더 많은 감정들에 공감해주실 수 있는 친구이다. ‘어린이다움’을 유치하다고 내어버린 많은 어른들과 달리, 수녀님은 ‘어린이다움’을 무한히 성장시킨 진정 성숙한 어른이다. 긴 세월이 허락한 지혜는 그렇게 이 시대의 색깔을 입힌 그릇에 담겨 나와 다음 세대의 양식이다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