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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Nov 15. 2020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초코파이

결핍의 맛

삼십 년 인생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 하나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떠오르는 음식 하나가 있다. 벌써 10년이 흘렀지만 첫 한입을 베어 먹을 때 혀에 닿은 몰캉한 촉감 기억한다. 시시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2011년 1월에 먹은 초코파이다.




73년 만의 최고 한파였다는 그 겨울, 의정부 육군 306보충대 신병훈련소에서 받는 5주 간의 기초훈련은 그야말로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손이 부르터서 하얗게 변했고, 조금 과장하자면 입술이 얼어 입이 벌어지지 않을 정도의 추위였다.


하지만 얼어 죽는 것보다 견디기 힘든 게 있었으니 바로 간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훈련병이라는 이유 하나로 PX(군 편의점) 사용이 금지됐기 때문이었다. 과자나 음료수 그 어떤 간식도 먹을 수 없자 고작 며칠 만에 사회에서 축적해둔 당 수치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 당 수치가 0이 된 것이다. 사회에서 과자를 즐겨 먹는 편이 아니었지만, 과자와의 단절된 삶이 일주일을 넘어서자 안절부절못하는 금단 증상이 생겨났다. '얼어 죽어도 좋으니 과자 하나만 먹게 해 주세요.' 기도를 했다.



"종교활동 갈 사람 있나?" 훈련이 3주쯤 지났을 때로 기억한다. 빨간 모자를 눌러쓴 조교가 목소리를 깔고 인원 파악을 시작했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준다길래 교회에 가거나, 중학생 때 선생님의 권유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거나, 가끔 부모님을 따라 절에 가면 마음을 평온을 얻곤 했지만, 당시에는 믿고 있던 종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교회에 손을 번쩍 들었다. 혹여나 종교가 없다고 했다간, 신을 믿지 않았다는 죄로 막사에 남아 제설 작업을 하게 될 게 뻔해 보였다. 교회와 성당, 절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가장 먼저 인원 체크를 한 교회를 택한 것이다.


힘찬 군가를 부르며 오와 열을 맞춰 10분 정도 떨어진 군 교회로 향했다. 교회 입구에는 이미 다른 분대에서 온 훈련병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자 입구 앞에 서 있는 목사님 한 분이 보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검은 안경을 쓴 목사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맛있게 드세요"라 인사를 건넸다. 그의 손에 있던 빨간색 포장의 초코파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순간 목사님 뒤로 환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하느님이 지금 이 세상에 환생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오, 할렐루야. 신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교회로 입장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봉지를 뜯고, 초코파이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잠시 잊고 지내던 속세의 맛이었다. 오랜만에 당이 몸속으로 들어오자 신내림을 받은 듯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비천한 훈련병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내어주시다니. 한 시간 예배 동안 "예순 나의 친구, 예순 나의 사랑~" 열심히 찬송가를 따라 부르고, 누구보다 크게 "아멘!"을 외쳤고, 초코파이 목사님의 설교에 쫑긋 귀를 기울였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초코파이의 힘었다.


막사로 돌아오자 불교에서는 스님이 초코파이보다 100원이나 더 비싸고 과자계의 고급 요리로 손꼽히는 '몽쉘'을 줬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성당에서는 신부님이 민간에서 공수해 온 피자로 파티가 열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약한 중생들을 두고 치열한 종교 전쟁이 이곳 의정부 306보충대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몽쉘과 피자파티에 굳건했던 기독교에 대한 신념이 순간 흔들렸던 건 사실이지만, 초코파이 목사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에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가 되지 않기로 다짐했다.   




가끔 편의점 진열대에서 초코파이를 발견하면 그날의 맛을 떠올린다. 이제 초코파이는 줘도 안 먹는 쉬운 과자가 됐지만, 그때의 초코파이는 신의 존재를 믿게 할 정도의 맛이었으니까. 그 맛의 비결은 언컨데 결핍서 비롯됐다. 초코파이가 없어 봐야 초코파이의 소중함을 알고,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 휴지가 보이지 않을 때야 휴지 한 장의 소중함을 아는 바보 같은 존재가 인간인 걸까. 헤어지고 나서야 사랑임을 깨닫고,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소중함을 아는 그런 존재 말이다.


누군가 내게 미친 듯이 무언가를 사랑하는 방법을 묻는다면, 의도적인 결핍을 잠깐이라도 느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밥맛이 없다면 이틀만 쫄쫄 굶어보는 거다. 밥그릇에 붙은 마지막 쌀 한 톨을 싹싹 긁어먹는 당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만남에 지쳤다면 한 달간 아무도 만나지 말아보라.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도 따뜻한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사는 곳이 싫다면 삼일 동안 밖에서 잠을 자보라. 뜨끈뜨끈한 바닥에 이불 하나 덮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신이시여"를 외치며 스스로 단잠에 들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소중한 무언가는 늘 곁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잠깐이라도 사라지는 결핍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 순간 만큼은 영원하리라 믿으니까. 결국, 그것이 실제로 영영 사라져버린 뒤에야 깨닫고 만. '참 소중했구나'라고. 초코파이, 휴지 한 장, 시간, 물, 사랑하는 연인, 부모... 그 무언가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사실을 알면서도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다가 후회를 반복하는 나를 보니, 참으로 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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