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처음 눈을 떴을 때 나의 하루는 희미하다. 현실 감각이 몸 안으로 스며들어오지 않아 붕 뜬 상태라고나 할까.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침대를 벗어나 샤워부스로 향한다. 가장 먼저 샤워를 하는 것은 정신이 정신이 들게 하기 위함이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따뜻한 물에 몸을 데우면 시나브로 온몸의 세포가 꿈틀꿈틀 깨어난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정신이 또렷해진다. 아,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정신은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인다.
정신이 깨어날 때면 잡념이 슬금슬금 떠오른다. 샤워부스 맞은편에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며경험하지 않은 오늘 하루를 떠올린다. 하필 이때, 틀어놓은 스마트폰 유튜브에서 '우리 나중에 파리 여행 가면 에펠탑 보면서 같이 듣자'란 제목의 한 채널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만약에 문을 열고 샤워부스를 나왔을 때 펼쳐진 오늘이 파리에서의 하루라면 어떨까. 나는 파리의 어느 앤티크한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있다. 샤워부스를 나오자 창문 안에 에펠탑이 보인다. 파리지앵처럼 옷을 차려입는다. 카페 밖 테이블에 앉는다.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선선한 파리의 가을을 즐긴다. 오늘 내가 향하는 곳은 오랑주리 미술관. 벽면을 가득 채운 모네의 역작 <수련>을 보러 가는 날이다. 저기 문밖의 오늘은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이니, 샤워부스에서 혼자 펼쳐보는 상상은 감칠맛이 난다. 현실이라면 당장이라도 샤워부스를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다.
슬프게도 설레는 상상은 찰나처럼 막을 내린다. 샤워시간전반전이 끝날 때쯤이면 현실 인식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저기 문밖은 얼마 전 이사 온 세종시이고 나는 출근하는 직장인이지. 아침을 물 한잔으로 때우고 대충 머리를 말리고, 허겁지겁 옷을 걸치고 뛰쳐나갈 것이다.경보 선수 같은 빠른 걸음으로 아홉 시 땡 회사에 도착할 것이다. 여느 때처럼 한숨을 쉬며 일하다 기진맥진 집으로 돌아와 멀뚱멀뚱 소파에 누워 시간을 보내며 잠들겠지. 샤워부스에서 만나는 오늘 하루의 첫인상이다. 진짜 첫인상.
따분할 하루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나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문밖의 하루는 오늘 아침 샤워부스 안에서 스스로 설정해둔 각도를 좀처럼 벗어나는 일이 없다. 사람의 첫인상이 쉽사리 바뀌지 않듯이 어쩌면 오늘 하루는 샤워부스에서 처음 마주하는 순간모두 결정나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일도, 그다음 날에도 일어나자 마자 샤워부스로 향할 것이다. 샤워 도중 현실감각이 돌아오면하루의 모습을 떠올려볼 것이다. 문밖의 세계가 파리는 아닐지라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떠올리기만 해도 설레는 무언가가 레드카펫처럼 펼쳐진다면 좋을 텐데. 언젠가샤워부스에서 맞이하는 그날의 첫인상이 무척이나 설레서 비누칠도 대충하고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은 채 당장이라도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아니면 지루한 듯한 첫인상을 깨버리는 반전 있는 하루가 나타날 수 있을까? 당장 문밖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매번 샤워를 마치고도 좀처럼 샤워부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