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르바 Nov 09. 2020

서울말 모드와 사투리 모드

나의 페르소나

내겐 <서울말 모드>와 <사투리 모드>가 있다. 모국어는 경상도 사투리지만 서울말도 네이티브 수준에 가깝다(라고 생각한다). 서울 사람 앞에는 티가 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경주에서 태어나 스무 살까지 이십 년을 보냈으니 사투리 하나는 자신 있다. 처음 서울말을 배우게 된 계기는 상경 후 순수한 의사소통 때문이었다. 서울의 재수학원에 들어갔는데 친구들이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과묵한 재수생 코스프레를 했다. 그때 충격으로 남몰래 티비 드라마를 보며 서울말을 주경야독했다. 


본격적으로 서울말을 배운 것은 스물다섯. 대학교 3학년생이 되며 막 취업전선에 뛰어들 때였다. 언론계 쪽으로 준비했다. 여기저기서 "방송 쪽으로도 도전하려면 서울말을 잘 구사해야 한다"는 조언을 건넸다. 사투리가 뉴스 신뢰성을 저하시킨단다. 동의할 수 없었지만, 어쩌겠나. 어설픈 서울말을 고치러 스피치학원에 등록했다. 출렁거리는 억양을 평조로 쭉 펴는 연습을 했다. 튀는 소리는 꾹꾹 눌러버렸다. 반년 넘게 연습해도 토종 서울 사람처럼 구사하는 건 버거웠다.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다. 다행(?)인 것은 지금 내가 택한 일을 할 때는 카메라 앞에 설 일이 없다. 의식적으로 서울말을 쓸 이유도 사라졌다. <서울말 모드>와 <사투리 모드>를 중구난방으로 쓰게 된 배경이다.


문제는 서울말을 쓰냐, 사투리를 쓰냐에 따라 내가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어느 말을 쓰냐에 따라 두 개의 페르소나가 만들어진다고나 할까. 성격과 행동, 태도가 모두 확 달라진다. 서울말은 주로 모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업무적으로 만날 때, 소개팅 첫 자리 같은 장소에서 사용하는 언어다. 격식 있고 정제된 언어를 구사한다. 보통 상대는 "예의 바르다", "착하다", "바르게 자란 것 같다"라고들 한다. 반면에 사투리는 오래된 고향 친구나 가까워진 지인들을 만나면 나온다. 거리낌 없이 속이야기를 편하게 건넨다. 그래서 인지 "능글맞다", "가증스럽다", "웃기다", "특이하다"는 식으로 본다. "뭐 드실래요?"라는 물음에 <서울말 모드>에서는 "아, 원하시는 거 드셔도 돼요."라고 상냥히 대답한다면, <사투리 모드>에서는 걸쭉하게 "오늘 마, 짜장면 함 말아 먹어보입시다." 이런 느낌의 차이.


말투 하나 다를 뿐인데, 성격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곰곰이 차이점을 생각해 보면 서울말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형 언어’로 습득했던 것 같다. 재수학원에서는 서울 친구들과 친해지려고 드라마를 보며 치열하게 서울말을 따라했고, 면접장에서 격식 갖춘 지원자처럼 보이기 위해 피나도록 카메라 앞에서 연습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서울말을 쓰면 대화의 초점이 내가 아닌 상대방으로 옮겨진다. 미움 받을 행동을 하지 않는데 초점을 두는 것이다. 더욱이 서울말을 쓰면 화도 잘 못 낸다. 서울말로 화내는 방법을 모른다. 애초에 화내는 서울말을 배우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서울말을 쓸 때는 오로지 상대에게 잘 보이려는 말로 대화를 연습해온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 사투리를 쓰면 감정 표현이 훨씬 자유롭다. 서울말과 달리 어릴 때부터 쌓아온 자연스러운 나의 성격이 사투리에서 묻어나는 게 아닐까. 생존과는 별개이다 보니 대화 상대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부담이 적다. 상대 반응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집중한다. 초점이 나에게 맞춰지니 솔직해진다. 조금 창피스러운 속이야기도 망설임 없이 꺼낸다. 하지만 감정이 지나치게 투박하다 보면 가끔 상대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다. 1987년 KAL기 폭파사건 주범 김현희가 체포된 뒤 북한 간첩 신분을 속이려 일본만만 쓰다가, 한국 정보원이 목욕탕에서 그녀에게 몰래 뜨거운 물을 부었더니 "아 뜨거!"라며 북한말을 써 간첩임을 확인했다는 속설처럼, <사투리 모드>가 진짜 나의 모습인 걸까?


서울말을 쓰는 잘 갖춰진 모습의 내가 괜찮아 보이다가도, 사투리를 쓰는 솔직한 나로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요즈음이다. 첫 만남부터 <사투리 모드>에 들어가자니 격식을 깨버리는 것 같고, <서울말 모드>로만 일관하면 무미건조한 대화가 이어지는 느낌. 아예 요즈음은 첫 만남에서 서울말을 쓰다가 세 번 정도 넘게 만났다 싶으면 자연스레 사투리로 넘어가는 ‘자동 전환형 모드’를 개발하는 단계까지 왔다. 어떨 땐 상대에게 농반으로 "어느 모드가 편하니?"라며 ‘맞춤형 서비스’도 제공한다. 


완벽한 서울말을 구사하면서 사투리를 쓸 때처럼 자유로운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면 베스트 오브 베스트일 텐데… 아마도 이번 생은 글렀다. 다시 본토 사투리만 쓰는 촌놈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은 듯하고, 완벽한 서울말을 구사하기에는 언어 회로가 굳어버린 듯하니 어쩌겠나. 애초에 인간이란 필연적으로 상황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를 가진 존재라면, 결국 서울말을 쓰는 나도 나일 테고 사투리를 쓰는 나도 내가 아닐까. 모드에 따라 극과 극으로 달라지는 나의 생각과 경험을 매번 만나볼 수 있느니 어쩌면 축복 같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서울말과 사투리의 중간 어딘가에서 맴도는 중이다. 곧 있을 저녁모임에는 어떤 모드로 ‘짜잔’하고 나를 한 번 드러내볼까 고민하며 문밖을 나선다.

매거진의 이전글 카페 알바에게 두 여자와의 만남을 들켜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