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서울의 신축 오피스텔 1층에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들어왔다. 눈대중으로 봐도 60석이 훌쩍 넘는 2층 규모의 공간이다. 저렴한 커피 가격에 은은한 조명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작업을 하는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다. 아침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잡기가 어려울 만큼 늘 손님으로 북적였다. 나 역시도 평일과 주말 가릴 것 없이 작업할 때나 커피 한잔의 힐링을 할 때면 단골처럼 즐겨 찾았다. 자연스럽게 지금은 헤어진 여자친구와도 이곳에서 데이트를 했다. 같이 책을 읽거나 일을 하고 수다를 떨곤 했다.
햇살이 좋았던 주말로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취직한 동생이 서울로 올라왔다. 아직 살 집을 구하지 못해 조그마한 우리 집에 얹혀살고 있을 때다. 나는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비행 준비를 마친 동생이 승무원 복장을 입고, 캐리어 가방을 끌고 카페로 내려왔다.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시켜도." 나는 아무 말 없이 카드지갑에 있던 체크카드를 동생에게 건넸다. 주문한 아아가 나오자 동생은 내게 카드를 돌려줬다. "고맙데이." 무뚝뚝한 인사를 건넨 동생은 카페를 나와 공항으로 떠났다.
동생이 떠나자마자 나도 짐을 싸러 카페를 나와 15층 집으로 올라갔다. 여자친구와 렌터카를 타고 서울 근교로 여행 갈 참이었다. 옷을 갈아 입고 간식거리를 챙기고 있을 때쯤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막 1층 카페에 들어왔으니 준비가 끝났으면 내려오라고 했다. 나는 곧 내려갈 테니 커피만 챙겨서 곧바로 주차장으로 오라고 했다.
내가 주차장에 도착할 때쯤 양손에 커피를 든 여자친구가 걸어왔다. 날 보자마자 여자친구가 말했다.
"오빠. 카페 알바가 오빠가 딴 여자 만난다던데, 무슨 말이야?"
"응????"
"카페 알바생이 나 오기 10분 전에 오빠가 카페에서 다른 여자 만나는 거 봤대. 바람피우는 것 같다고 알려주던데."
커피 주문을 하려고 하니 여자 알바생이 카드를 건네받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알려줬다고 했다. 안절부절 못하며 본인이 알려줬다는 사실을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까지 했다고 했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건. 이성을 부여잡고 생각했다. 순간 커피를 사들고 간 동생이 떠올랐다.
"아, 그 여자, 내 동생이야, 친동생."
전말을 알게 된 그제야 나는 배가 뒤집어져라 웃었다.
"동생이었어? 난 알바생이 막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큰일 났다는 표정으로 알려 주길래 무슨 일인가 했네."
참 고마웠던 건 당시 여자친구의 행동이었다. 여자친구는 알바생의 '놀라운 첩보'를 듣고도,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전까지 내게 어떤 화도 내지 않았고, 오히려 차분하게 상황을 알려줬다.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바람피운 거야?"라고 이성을 잃고 따져 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확실한 건 알바생은 평소 내가 여자친구와 함께 카페에 온 것을 바쁜 와중에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진한 화장을 하고 승무원 복장을 입은 어떤 여자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한 걸 목격했다. 아주 잠깐 왔다간 동생과 바람을 피운다고 홀로 확신했던 거다. 한 여자를 보낸 뒤 10분의 시간텀을 두고 아무렇지 않게 또 다른 여자친구를 불러내 교대로 만나다니...! 몸까지 부들부들 떤 걸 보면 나의 악행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듯하다. 아마 선수라고 생각했으려나. 아무튼 상황을 알게 된 우리는 주차장에서 서로 숨이 넘어갈 듯 함께 웃었다.
생각해보니, 이 사실 관계를 알바생에게 알려야 하는지 고민이 생겼다. 처음에는 웃으며 넘겼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괘씸하기도 했다. 정확한 사실도 모른 채 내가 바람피운다고 단정하고 정의의 사도처럼 거짓 정보를 퍼트리다니. 뭔가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지나친 오지랖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자친구에게 "내가 가서 첫 번째 여자는 내 친동생이었다고 말할까?"라고 물었다. 여자친구는 "그럼 앞으로 카페 갈 때 서로 불편할 수 있으니까 그냥 가자"라고 했다. 나도 판단이 서지 않았기에 카페를 들르지 않고 곧바로 차량에 탑승했다.
문제는 그날 이후였다. 나는 여전히 집 바로 아래 있는 이 카페의 단골손님이었다. 나와 두 여자와의 관계를 알리지 않았기에 알바생은 여전히 나를 "바람피운 나쁜 새끼"라고 알고 있을 터였다. 지금이라도 "그때 사실..."이라고 하면서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는 것도 모양새가 좀 이상했다. 어쨌든 나는 당당했기에 주문대에 서서 평소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샷은 하나만 넣어주세요."라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짧게 "네."하고 주문을 받았다.
알바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알바생은 여자친구가첩보 제공자가 누구인지 알려줬단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나 덕분에 한 여자를 살리고 정의 구현을 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바람 폈으니 두 여자 모두와 헤어졌겠지'라고 생각하려나? 아무 일 없는 척 하길래 계속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기어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가 손수 내어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고는 그때 그 창가자리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대학생 시절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토론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알바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생각이 들어서다. 알바생이 손님의 사생활인 만큼 모른 채 넘어가는 게 정의일까? 아니면 정의 구현을 위해 목격 사실을 알려주는 게 맞는 걸까? 내가 만약 알바생인데, 이 같은 상황을 목격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알바의 정의를 둘러싼 철학적인 고민이 쏟아졌다. 우리 주변엔 정의로운 자들이 넘쳐나니 늘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