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초 3학년 6반 4번 일기장 1999년 8월 5일 목요일 날씨 흐림. 제목: 나의 홈런 2방 (알리는 글)
야구 경기에서 쓰리런 홈런과 만루 홈런으로 팀을 이끌었다. 조르바 선수는 강준원 형 선수의 공을 받아쳐 좌측 울타리를 넘겼다. 이 경기로 나는 겁이 없어졌다. 형들이라고 못하고 겁내는 것이 아닌 것을...
인생 첫 홈런이었다. 그것도 연타석 홈런 두방. 얼마나 기뻤는지 '알리는 글'이라고 일기장에 쓰고 나의 홈런 소식을 신나게 알렸다. 나는 우리 집 청우아파트 놀이터에서 형들과 야구를 즐겨했다. 발 빠른 교타자 스타일의 선수였다. 형들은 주자가 나가면 나에게 늘 번트를 시켰다. 나이다 제일 어려서 힘이 없고, 실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나 역시 홈런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늘 방망이를 휘두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주자 1, 2루 찬스. "번트대 번트." 골목대장 김아론 형이 지시했다.
'나도 배트 한 번 휘둘러 보고 싶다...'
무슨 용기가 나서였는지 모르겠으나 이번만큼은 번트를 대기가 싫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투수 준원이 형의 공이 날아왔다. 배트를 힘차게 휘둘렀다. '땡!' 알루미늄 배트에 테니스 공이 찰싹 맞았다. 짜릿한 진동이 온몸에 느껴졌다. 테니스공이 왼쪽 놀이터 울타리를 훌쩍 넘어갔다. 홈런! 짜릿한 역전이다. 별 일 아니었다는 듯 시크하게 1루, 2루, 3루 베이스를 치례차례 밟은 뒤 홈베이스에 들어왔다. 형들이 다가와 얼싸안고 축하를 건넸다. "대단하다!" 아론이 형도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놀라워했다.
홈런을 친 뒤 '이 경기로 나는 겁이 없어졌다'라고 일기장에 선언했다. 정말 그랬다. 한 번 홈런을 때리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홈런 한 방에 자신감이 확 상승했다. 다음 타석에서도 만루 홈런을 쳤다. 번트만 대는 교타자인 줄 알았던 내가 알고 보니 홈런 타자였다니! 몰라봤던 재능을 찾은 것이다. "너는 무조건 번트만 잘 되면 돼." 형들의 말에 야구를 못한다고 겁내던 두려움이 홈런 한 방에 울타리 너머로 휙 날아가버린 날이었다. 어쩌면 이날이 내 인생 최초로 주체적인 결정을 내린 날이 아니었을까.
'너는 이래서 안 돼', '너는 저래서 안 돼.' 나를 갉아먹는 공들이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요즈음이다. 이 공들은 결국 내 삶의 영역을 침벅해 나를 규정해버리고, 어느샌가 굳어지게 만든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맞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최선이야." 나 역시 무한한 가능성을 억눌러버리는 강속구를 스스로에게 날려 보낸다. 그럴 때면 나의 작전은 매번 똑같았다. "맞아. 평소처럼 번트나 대야지."
이젠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앞으로는 "에라 모르겠다!" 눈 딱 감고 배트를 휘둘러 볼테다. 이제는 나를 위해 힘차게 스윙을 해볼 참이다. 나를 억누르고 갉아먹는 공들아, 날아와 보시지! 이승엽처럼 신나게 방방이를 휘둘러 담장을 넘겨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