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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Sep 13. 2020

콜라에 미친 사람을 만났다

콜라에 담긴 행복을 마시다.

 


얼마 전 전남 장성으로 출장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볼일을 다 마치고 장성역에 도착했다. 세종으로 올라가는 무궁화호를 타려던 참이었다. 시간이 40여 분 정도 남아 잠깐 동안 머물 카페를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카페보단 다방이 많아 보이는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라 큰 기대를 접고 있었다. 다행히 역사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건물에 이디야 커피 간판이 보였다.


도박을 하지 않으려면 프랜차이즈 카페가 제격이다 싶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역사 건물 안에 입점해 있는 정체불명의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저 가게는...?" 창문 안으로 들여다본 가게의 첫인상은 괴이했다는 표현이 아주 적절해 보였다. 카페 이름은 'THE COKE'. 카페도 아닌 것이, 술집도 아닌 것이, 뭣이여 저건.


더코크 가게 입구


"웬 시골에 콜라가 이렇게 많아?" 귀신에 홀린 듯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새빨간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다. 온 사방이 만여 개의 콜라병으로 가득했다. 순간 거대한 콜라병 안으로 들어가 있는 액체 콜라가 된 것만 같았다. 헨젤과 그레텔이 마귀할멈의 과자집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3만 여명의 작은 시골 마을에 콜라 전문 가게는 나의 상식으로는 어울릴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기존 양식을 무너뜨리고 해체시켜 버린 현대 미술 같은 반전에 한동안 충격을 받았는지 이디아커피는 어느덧 뒷전이 됐다. 이곳 콜라 가게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고 자리를 잡았다.  


한정판 콜라는 한 병에 4000원, 일반 병 콜라는 2500원이었다. 자몽, 레몬, 커피를 섞은 믹스 콜라는 5000원. 건강을 유달리 챙기는 성격인 탓에 평소 탄산음료를 거의 입에 대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색다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휩쓸려버렸다. 앞으로 평생 이런 콜라는 맛보지 못하겠지, 라는 생각에 '믹스 콜라'를 주문하려 했다. 주문을 앞두고 커피와 콜라를 믹스한 맛을 상상해보았다. 그런데 도저히 나의 미각 범주에서는 커피와 콜라가 혼합된 맛이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를 리가 없었다. 사장님께 수줍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런(?) 콜라는 처음인데... 뭐가 좋을까요...?" 사장님은 첫경험이니 무리하지 말고 '한정판 콜라'에 먼저 발을 담겨보길 추천했다.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마셔 본다는 기분으로 한정판 콜라 한잔을 주문했다.


콜라병을 따고 와인 마시듯 한 모금 입을 댔다. "사장님, 여기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콜라 전문 가게예요. 제가 다 모은 거예요." 금목걸이를 한 우람한 체격의 사장님은 수줍으신지 보기와 달리 소곤소곤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저기 저 2L 크기의 대형 콜라는 뭐예요?" 궁금증이 폭발한 내가 이것저것 질문을 건넸다. 사장님도 어느덧 긴장이 풀리셨는지 주섬주섬 콜라 컬렉션들을 하나둘 진열대에서 꺼내가며 설명해주셨다.


호돌이 콜라


어떤 콜라는 실물을 영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손쉽게 접근이 불가했다. 스위스 금고에 맡겨둔 비자금을 꺼내듯 어디선가 열쇠를 가져오더니 자물쇠를 땄다. 조심스레 콜라병 하나를 꺼냈다. 이 콜라병에는 추억의 캐릭터 호돌이가 그려져 있었다. 이른바 '호돌이 콜라'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기념으로 제작된 콜라라는 소개를 덧붙였다. 안의 내용물도 그대로란다. 모아둔 콜라 종류만 수백 가지인데 카페에는 더 이상 보관할 공간이 없어 따로 창고까지 마련했다고 한다.


이쯤 되니 사장님이 콜라를 처음 수집하게 된 계기가 슬슬 궁금해졌다. 사장님은 10년 전쯤 금전적으로 아주 힘든 때가 있었다고 한다. 힘든 하루를 버텨낼 때 우연찮게 친구가 알루미늄 콜라병 하나를 건네줬단다. 처음 보는 새로운 종류의 콜라병이라 신기했다. 이상하게 콜라병이 위안이 됐다. 예쁘게 생긴 콜라병을 버러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병도 모으기 시작했다. "금전적으로 힘들었는데 조금씩 행복을 느끼게 됐어요." 콜라는 그 인생의 포근한 안식처가 됐다.


사장님은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건넸다. 수십 년 전 만들어진 가게에 설치된 콜라 간판을 구하기 위해 대여섯 번 1000km를 오가며 시골 마을의 가게 주인을 설득한 이야기, 분리수거장에서 득템 한 검은 뚜껑 콜라 이야기, 공무원인 그의 사무실로 해외 배송한 콜라 택배가 쏟아지자 "저 친구 미쳤다"며 비웃던 사람들도 인정해주더라는 이야기... 기상천외한 무용담을 듣다 나니 40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콜라 설명에 해맑은 사장님

"삶은 힘들어도 꿈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게 정말 좋은 거 같아요." 그의 꿈은 콜라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꿈이 있는 사람, 어딘가에 미쳐있는 사람은 눈빛과 말투부터 다른 기운을 내뿜는다. 콜라를 설명하는 사장님의 말투는 어느새 놀이공원에 온 듯 신나 있었다. 콜라병을 꺼내 바라보는 눈빛은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했다. 무언가에 미쳐서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서 나오는 응축된 에너지에는 돈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신성한 아우라가 존재하나 보다.


치킨과 피자에도 콜라를 마시지 않던 나인데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빠져 한정판 콜라를 다 비워냈다.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와의 짧은 추억을 가방 안에 넣고 허겁지겁 역사로 뛰어갔다. 간신히 무궁화호에 탑승했다. 의자를 뒤로 훌쩍 젖혔다. 피로가 밀려왔다. 나른해진 몸을 의자에 내맡겼다. 그의 열정과 행복이 담긴 인생을 마셨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스르르 몰려왔다. '난 무언가에 미쳐서 행복해하던 때가 언제였을까...' 구수한 기차소리를 배경삼아 홀로 긴 상념에 빠졌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콜라 기운 덕분인지는 몰라도 기분 좋은 단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장성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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