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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Sep 20. 2020

직장인의 휴가법

휴가의 의미

직장인의 휴가


직장인인 내게 억만금을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휴가다. 나는 지금 바로 그 기다리던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 한때 나만 유달리 휴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내 주변 동기와 선후배, 직장인 친구들을 보면 그랬다. 반년 전부터 휴가 계획을 세우고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는다거나 밥을 먹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대화의 흐름이 휴가 때 뭘 했는지, 또 다음 휴가에는 뭘 할 건지로 끝맽는 걸 보면 말이다.


나를 포함해 직장인 친구나 동료들이 휴가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부분이 있다. 바로 '단절'이다. 휴가 중인 그들의 카카오톡 프로필이나 상태 메시지를 보면 단박에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다. 카카오톡 프사에 빨간 글씨로 대문짝만 하게 '휴가 중/연락 금지'를 써놓거나, 상태 메시지에 "휴가 중이라 연락이 안되니 이해 바랍니다" 같은 것들이다. '사장이라도 휴가 때만큼은 날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 같은 선전포고라고나 할까. 휴가 기간만큼은 회사의 일과는 일만큼이라도 연결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눈치 없이 내게 연락하지 말라는 뜻인 셈이다.


카카오톡 프사 화면

내가 속해 있는 '기자'라는 직업군으로 한정 지어볼 때 휴가 중 '단절감'은 더욱 간절하고 치열해지는 것 같다. 기자들의 휴가 최대 목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회사의 연락이 최대한 닿지 않는 곳, 최대한 세상과 단절된 곳을 찾는 것. 적어도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에는 그랬다.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와 같은 원리라고나 할까, 물리적으로 회사와 멀어짐으로써 일과 단절됐다는 자기만족을 맛보는 것이다. 그럴 일은 없지만 정말 혹시나마, 혹시나 국내로 여행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사건사고라도 터진다면... 꿀맛 같던 휴가를 뒤로 하고 1분 1초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취재 현장으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0.00001%의 연결 가능성마저 차단하기 위한 기자들만의 '안전장치'인 셈이다.


나는 일과의 단절에 대한 욕망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인지도 모르겠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대문짝만 하게 '휴가 중'을 쓰고 티 내지 않는 걸 보니 말이다. 이번 여름휴가 하루 전까지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을 봐도 양반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나 역시 휴가를 간절히 기다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희망' 하나로 십여 년간 교도소에 구멍을 파 탈출한 앤디의 심정이 휴가를 기다리는 직장인의 희망과 같다고 한다면 너무 오바스러우려나? 아무튼 직장인인 내가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래도 "휴가를 갈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임은 틀림없다.


직장인인 내게 휴가는 스물한 살 군인에서 가졌던 휴가 못지 않게 소중하다. 군인이나 직장인의 휴가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내 결론이다. 특히 희망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그렇다. 군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정말이다. 군 입대를 하고 첫 100일 휴가를 앞둔 한 달 전부터 '디데이 카운팅'을 시작했었다. 잠들기 전 군대에서 보급해준 병영 수첩에 볼펜을 꾹꾹 눌러 적었다. D-30, D-29, D-10, D-1... 이등병이 휴가 생각만 한다고 한소리를 들을까 봐 겁났다. 침낭을 뒤집어쓰고 플래시 불빛을 켠 뒤 선임들 몰래 적었던 기억이 난다. 디데이 숫자가 줄어들수록 내 몸 안에 도파민은 디데이와 반비례하며 무지 막하게 솟구쳤다. 이등병 당시 카카오톡도 없었고, 공중전화 1541 수신자 부담 전화로 일주일에 한두 번 전화를 할 수 있던 때다. 물론 이 역시 선임의 허락을 받아내야 겨우 한 통을 걸 수 있었다. 휴가가 그야말로 희망이던 시절이었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당시 휴가가 정확히 몇 박 며칠이었는지 기억마저 가물가물해졌다.(디지털 치매 영향인가.) 희미해진 내 기억이 맞다면 4박 5일 정도의 길지 않은 휴가였다. 군부대가 있던 포천 일동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1시간이 지나자 창밖으로 올림픽대교가 보였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버스가 도착하자 문 앞에는 여자 친구가 해맑은 표정으로 서 있던 걸로 기억한다.(내 기억이 왜곡되지 않았다면. 물론 여자 친구는 진리의 '일말 상초' 기간 날 떠났다.) 여자 친구와 함께 보낸 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경주로 내려갔다.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은 이십 평생 접하지 못했던 진수성찬이었다. 최후의 만찬 같은...!(이후 휴가가 서너 번 반복되고 휴가가 일상이 되자 진수성찬은커녕 홀로 라면을 끓여먹어야 했다. 심지어 부모님은 상병이 된 뒤 새 아파트로 이사한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5일 동안 세상에서 가장 바쁜 대기업 회장님의 스케줄을 소화한 것 같은 속도로 휴가를 보냈던 것 같다. 그래서 였을까.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였는지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느덧 나는 군 막사에 들어와 있었고, 다려 입은 군복을 입고 있었고, 슬픈 목소리로 '돌격'을 외치며 휴가 복귀 보고를 건네고 있었다. 시간의 상대성이란 참 신기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처음으로 몸소 체험했다. 그날 밤 나는 또다시 침낭에 들어가 선임들 몰래 플래시를 켜고, D-100을 병영 수첩에 적고, 일병 정기 휴가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또 버텨나갔다. 나의 군생활은 휴가를 큰 마디마디로 두고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21개월짜리의 악보였다고나 할까. 악보의 주제는 단연코 '희망'이었다.


이번 휴가는 군대 첫 휴가보다 다행스럽게도 좀 더 길다. 주말을 붙여 9일이다. 거창한 계획을 하나둘 세웠다. 자전거나 스쿠터 타고 제주도 한 바퀴 돌기, 히치하이킹을 해서 전국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기, 템플스테이 떠나기 같은 것들이었다. 어딘가로 떠나 모험과 여행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짓눌렀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휴가=여행' 공식이 늘 머릿속에 깔려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휴가가 끝난 뒤를 생각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다시 일을 시작할 때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아, 그래도 지난번 휴가 때 여행 실컷 다니고 아낌없이 시간을 보냈잖아'라는 자기위안 덕분이었다.휴가를 꽉꽉 채우지 않고 빈둥빈둥 보냈다간? 지난 휴가를 후회하며 후폭풍이 몰아치곤 했다.


휴가 당일. 고향 경주를 베이스캠프 삼 구체적인 여행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집에 도착해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고작 몇 분도 흐르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부터 '휴가를 멍하게 보내선 되겠냐'는 목소리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문득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본 경주의 한 목장 '화랑의 언덕'이 떠올랐다. 이효리가 방송에 다녀가 최근 관광객들의 성지 같은 장소가 됐다고 한다. 30만 평 규모의 넓디넓은 자연 공간에서 사진 찍기 좋은 여행지로 인기를 얻고 있었다. 고향 부심이 유달리 강한 나로서는 여기를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단, 뭐라도 하며 시간을 보내야 덜 불안할 것 같았다. 휴가를 채워 넣어야 한다는 강박 증세도 작동했다.


화랑의 언덕 '명상바위'

친구 차를 얻어 타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화랑의 언덕'에 도착했다. 윈도 배경화면처럼 넓은 자연 공간을 배경 삼아 사진 찍기에 원 없이 좋아 보였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장소가 여기였구나.' 사진과 실제를 비교하며 비슷하게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제일 예쁘게 나온다는 '명상 바위'는 짧은 줄을 선 뒤에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목장에서 키우는 돼지와 양도 보고, 그네도 탔다. 배가 출출해진 우리는 목장을 빠져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화랑의 언덕 10점 만점에 몇 점이고." 차 안에서 친구에게 물었다. 운전하던 친구는 갑자기 빵 터지더니 말하기를 머뭇거린다. "왜 몇 점인데, 말해봐라." 내가 재촉하자 친구는 "5.5점."이라며 또 한 번 크게 웃는다. 망설임은 친구의 배려였다. 나의 휴가 첫 여행지를 별로였다고 하면 내가 상처 받을까 봐, 쉬이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니는 몇 점인데." 친구가 되물었다. "나도 5.5점." 친구와 나는 또다시 한바탕 웃었다. 눈치게임이 끝나자 그제야 속시원히 서로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휴가니까 여행 같은 여행을 가얄 것 같아서 오자고 했는데 막상 사진만큼 예쁘지 않네." 내가 투덜거렸다. '정말 가보고 싶다'는 설렘보다는 '휴가니까 떠나야 한다'는 명령 같은 것이 나를 여행지로 밀어 넣은 느낌때문일지도 모르겠다.(연인과 왔다면 상황은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만.) 뭣보다 그때 우리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화랑의언덕 그네(?) 타기

동생이 추천해준 현지인 맛집을 찾아 근처의 한 식당을 찾아 오징어볶음을 시켜먹었다. 불맛 가득한 오징어볶음이었다. 공깃밥 2개를 시키고 배 터지게 먹었다. 친구에게 "이번엔 몇 점이냐"라고 묻자 "9.5점!"이라고 외쳤다. 이번엔 나도 "9.5점이다"며 웃었다. 소화를 시킬 겸 경주의 떠오르는 핫플레이스 '황리단길'을 찾았다. 황남동과 경리단길을 합친 골목이다. 젊은이들을 상대로 한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이 좁은 1.5차선 도로 양쪽으로 쭉 뻗어있다. 황리단길을 찾은 건 우리 여행의 계획이라기보다는 오징어볶음 덕분이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아 소화시킬 겸 산책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황리단길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렸다. 친구가 두리번거리며 "지갑 식당에 놔두고 온 것 같다"며 당황해했다. 다행히 확인해보니 식당에서 보관 중이었다. 친구는 나를 황리단길에 두고 지갑을 찾으러 다녀오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나 혼자 황리단길을 여행하게 다. 친구가 오기 전까지 잠깐 카페에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했다. 메인 거리에 있는 독립서점 '어서어서'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평소에도 서점과 북카페를 가는 걸 즐기는 편이서점에 들어가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런저런 책들을 둘러보다 입구에 진열돼 있는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불맛 나는 오징어 볶음


가수 장기하의 에세이집 '상관없는 거 아닌가?'였다. 처음 책을 펼쳐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잉? 갑자기 뜬금포로 장기하가 책을?'이었고, 둘째로는 '바쁜 인기 가수가 대충 대필해서 책 한 권 냈나 보네' 아니꼬운 시선이었다. 하지만 책 한 페이지를 읽자마자 잠깐 동안의 내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그의 글은 담백했다. 무엇보다 솔직했다. 이 사람 연예인 맞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인간 장기하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함에 이끌렸다. 어쩌면 내가 연예인에 대한 거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인기 연예인의 '허세 갬성 글'로 채워져 있겠다는 나의 생각을 보란 듯이 뒤집어 놓은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의 글들은 내가 요즈음 생각하고 있는 생각들과 무척이나 맞닿아 있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 살아가는 이유, 불교 철학에 대한 관심, 집착과 자유에 대한 고민 등 최근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던 주제들이었다. 덕분에 책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버릴 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었다고 했다. 이마저도 어쩜 나랑 이렇게 같을 수 있다니.


경주 독립서점에서 구입한 장기하의 에세이집

 

책을 구매하자, 지갑을 찾아온 친구가 돌아왔다. 우리는 황리단길 야외 테라스에서 여행객들을 구경하며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잔씩 마셨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하늘을 바라봤다. 신라시대에 머물던 바람이 불어오는듯한 고즈넉한 기분을 가져다줬다.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하늘이 서서히 노을빛으로 변해갔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침대 위에 누웠다.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른 '괜찮은 하루!'라고 장기하가 직접 적놓은 한정판 따끈따끈한 신상 책이 읽고 싶어 졌다. 장기하의 생각과 내 생각은 또 얼마나 닮아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커져갔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 어제만 해도 세웠던 거창한 여행 계획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왜냐하면 나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다 잠이 들었고, 오랜만에 지겨워질 만큼 잠을 잤고, 눈을 뜨고 또 책을 읽었다. 혼자 웃기도 하고, 삶을 반추해보고, 앞으로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책을 보는 행위는 남들이 보기에 휴가로서는 다소 시시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내가 정말 원하던 휴가였다. 책을 덮자 마음의 포만감이 가득 느껴졌다. 간만에 '괜찮은 하루'였고, '괜찮은 휴가'였다.


신라 경주의 하늘과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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