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서울대입구역 오피스텔 짐을 빼 세종의 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2년 만이다. 두 달 전쯤 세종으로 근무처가 바뀌고 한동안 두 집 살림을 했는데 완전히 서울 집을 빼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름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한다고 여기저기 떠벌려왔다. 헌데 막상 이사가 시작되자 6평 남짓한 방에서는 트로트 가수 영탁의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노래처럼 그동안 깊숙이 숨겨져 있던 짐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서울의 오피스텔 이삿날
아주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2014년 선물 받은 뒤 유물처럼 썩혀져 누렇게 변해버린 흰 셔츠, 2010년 구매한 대학명이 떡하니 적힌 점퍼, 6년 전 해외탐방을 가서 사 온 추억의 엽서, 2012년 이탈리아 아웃렛에서 구매한 뒤 너덜너덜해진 프라다 신발, 2016년 국정농단 사태 당시 쓰레기통을 뒤지며 찾아낸 관련 인사들의 물품들... 이들 상당수는 서울대입구역 오피스텔에 들어오기 전 살던 당산역 오피스텔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또 그 가운데 일부는 당산역에 살기 전 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 가져온 것들이다. 2년의 2년의 2년 전이니 6년 전 물건들도 오래간만에 마주할 수 있었다.
마주하자 '소유'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왜냐면 내가 소유한 것들이 이삿짐 차량에 실리는 순간, 보이지 않던 내가 짊어진 소유의 무게를 눈으로 실제 체감하는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국립박물관에서 출토된 황금 장식물들을 관찰하듯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왜 나는 여러 번 거주지를 옮기고, 학생에서 군인에서 직장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입고 쓰지 않는 것들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너 박물관장이야?'라는 생각도 함께. 이미 작아져버리거나 다 헤져 쓰지 못하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동안 이들을 버리지 못했던 건 물건에 서려 있는 청춘의 기억 내지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소유 그 자체에 대한 욕심과 집착 때문인 걸까.
소유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궁극적으로 삶에서 짊어져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결국 죽게 되면 어떤 것도 나는 가져가지 못하잖아. 그렇다면 무엇을 가져가고 버리면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의문 같은 것이었다. 소유에 대한 '현타'에서 비롯된 물음이라고나 할까. 뭐, 물론 이사 한 번 하면서 유난스럽다고도 볼 수 있겠다. 맞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다. 그랬다간 정말 미쳐버릴 수 있으니까. 다만 앞에서 말했듯 쏟아져 나오는 이삿짐의 실체를 마주하는 순간은 흔한 일은 아니다. 나 같은 경우 보통 2년 주기로 이사해온 만큼 이날만큼은 내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비어진 서울의 오피스텔, 15층에서 바라 본 경치가 참 예뻤다.
머릿속에 세운 나만의 기준으로 물건들을 나눠보았다. 내년 여름에 입어야지 생각한 옷들을 이듬해 입게 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복고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트렌드가 훌쩍 지나버린 옷들, 여기저기 기념품을 받아 쓰지 않는 접시와 수건들, 화장품 가게에서 하나씩 나눠준 샘플 화장품 등 버릴 물건을 모아보니 족히 한 트럭은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버릴 물건들을 모으는 일은 예전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어떤 물건을 버릴지는 예전부터 고민해오다 주제였는데 최근 나름의 판단 기준이 생긴 덕분이다.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에게 그 공을 돌리고 싶다. 그녀의 책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를 우연히 접한 뒤 나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제목처럼 '지금 설레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버리자!'라는 기준을 세웠다. 설레지 않은데 굳이 소유할 이유는 없으니까. 비슷한 맥락인데 '죽음'을 가정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소유한 물건을 버릴지, 가져갈 것인지 한결 쉽게 선택할 수 있다. 내일이면 죽는데 어떤 물건을 들고 갈지 말지 고민하는 것은 아주 '별 것 아닌' 바보 같은 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아주 극단적이나 아주 확실한 방법이다.
세종 집에 짐을 풀고 꼬박 이틀이 걸려 이삿짐을 정리했다. 이사를 마친 뒤 몸살을 앓을 만큼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버리고 또 버리다 보니 '아, 그래도 형체가 있는 것들을 버리는 건 꽤 할 만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들은 마음 딱 먹고 쓰레기통에 한번 집어넣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반면 머릿속을 지배하는 쓸모없는 생각들은 그 반대다. 이상하게도 생각은 버리면 버릴수록 커져만 가서 다시는 버릴 수 없게 만드는 아이러니를 만들어 버린다. 설레지 않은 물건들이 내게 행복을 주지 않듯이, 설레지 않는 생각들이 있다면 이들 역시 머릿속에서 버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라는 게 내 생각이지만 이는 참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00L 큰 분리수거 봉투에 설레지 않는 생각, 후회, 집착들을 집어넣고 새어 나올 수 없게 꽉꽉 묶어 버린 뒤 영영 돌아오지 않게 한다면 좋으련만, 그렇다면 참 좋으련만.
세종의 아파트 이삿날
쓰다 보니 내가 무슨 스님이라도 된 것처럼 소유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무소유만을 강조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법정 스님의 <무소유>, 소로우의 <월든> 같은 고전들이 넌지시 무소유의 존재 가치에 큰 무게를 두는 것과 달리 나는 그들 같은 위대한 인간도 작가도 아니기에 소유의 참맛도 늘 갈구하는 편이다. 또 그들처럼 속세를 내팽개칠 만한 용기도 없다(물론 이들도 소유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유독 집착하는 물건(?)인 '책'을 보면 그렇다. 어릴 적부터 "책 사는 데는 돈 아끼지 말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옷을 사거나 전자기기를 산다고 할 때는 짠돌이 같은 부모님이셨는데, 책을 산다고 하면 망설임 없이 용돈을 내주셨으니까.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뒤에도 눈에 든 책을 발견하면 가릴 것 없이 사는 편이다. 과소비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커피 2, 3잔 값이면 한 사람의 평생을 습득할 수 있다. 적어도 내겐 이보다 더 좋은 가성비 있는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다(혹 있다면 알려준다면 감사하겠다). 갈수록 늘어나는 책 때문에 이사 때마다 골칫거리긴 하지만 읽은 책의 형체를 볼 때마다 책에서 배운 교훈과 지식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일종의 강박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강박은 삶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고 믿는다. 사실 무언가를 '컬렉션'하는 취미를 가진 자나 전문가들도 작은 강박을 가진 사람들 아닐까(물론 이런 강박 혹은 집착이 일정 선을 넘어가 버리면 '저장 강박증'을 앓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서울 오피스텔 창고에 처박혀 있던 몇몇 조명 기구도 다시 살아났다. 지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구매한 트리 모양의 반짝거리는 조명과 <LOVE>라는 글씨가 핑크색으로 들어오는 조명인데 서울의 작은 집에는 과한 감이 없잖아 있어 버려둔 것들이다. 그런데 세종 아파트로 이사 온 뒤 TV 탁자 주변에 설치를 하자 근사한 인테리어 아이템으로 되살아났다. 무드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톡톡히 역할을 했다. '그때 버리지 않길 잘했다, 잘했어'라며 스스로 안도했다. 이사를 마친 뒤 친구들과 거실에서 와인 한잔을 기울였다. 분위기가 와인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이게 바로 소유의 축복이구먼.'
러브 조명
생각의 소유는 어떠한가. 올해 들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바로 메모하는 습관이다. 정말이지 삶을 바꿔놓았다고 할 정도로 큰 도움이 됐다. '적자생존', '글로생활자' 같은 언어유희처럼 내가 적는 모든 것이 나를 단단히 만들어 줬다고나 할까. 기록하는 습관이 차곡차곡 만들어진 뒤 순간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휴대폰을 꺼내 모두 메모한다. 이런 아이디어는 일을 할 때나 나를 알아갈 때처럼 모든 면에서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준다. 머릿속이 정리되니 후회할 일도 적어진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어도 생각을 그때그때 적어두는데, 적어둔 다른 생각들과 자동적으로 결합되며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를 가져오기도 한다. 인간은 하루에 3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하는데, 떠올랐다가 사라져 버리는 생각 중에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아이디어와 삶을 바꾸는 생각들도 분명 포함돼 있을 게 틀림없다.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맥시멀 리스트가 될 것인가 미니멀리스트가 될 것인가. 생각을 채울 것인가 비울 것인가. 최근 인상 깊게 본 영화 <인 디 에어>의 주인공 조지 클루니가 강연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그곳에서 "당신의 배낭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라고 묻는다.
“배낭을 멨다고 상상하세요. 어깨 위의 끈이 느껴지나요? 자, 이제 가진 걸 모두 넣으세요. 옷, 전자기기, 램프, 시트, 티브이…. 배낭은 점점 무거워지죠. 소파, 침대, 식탁, 차와 집도 넣어요. 배낭에 다 넣으세요. 걸어보세요. 힘들죠? 이런 게 일상입니다. 못 움직일 정도로 짐을 넣고 걸어가는 게 바로 우리의 삶이죠. 당신은 그 배낭에서 무엇을 뺄 겁니까?”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여행과 마찬가지로 어떤 생각과 물건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배낭을 통째로 버리거나, 필요 없는 물건을 가득 채워 끌고 다닌다면 진정으로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에 지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의 배낭이 앞으로의 여행, 그러니까 삶의 방향에 맞는 적절한 물건들로 채워진다면 좋겠다. 모든 사람의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다르듯, 여행에 맞는 배낭 속 짐들도 그들만의 고유한 물건들로 채워져야만 할 것이다. 남들이 좋다고 따라 채워넣었다간 필시 그 무게를 감당하기엔 쉽지 않아질테니. 그런 점에서 2년 만의 이사는 나의 짐들을 모두 바닥에 펼쳐내려놓고,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삿짐 차량은 장례식장까지 따라가지 않는다"는 말을 어느 한 영화에서 본 기억이 난다. 죽음 뒤에는 그 어떤 것도 들고 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사다. '오늘부터 내가 짊어지고 갈 배낭에서 뺄 것들은 무엇일까?' 곤도의 책에서 하루에 1개씩 설레지 않는 것을 버리라는 조언이 떠올랐다. 이번 기회에 워라밸(워크앤 라이프밸런스) 대신 소라밸(소유앤 라이프밸런스)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사 첫날인 만큼 오늘부터 도전해보자는 의욕이 샘솟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정오의 시간, 나는 지금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아델의 <롤링인더딥>을 들으며 거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책상 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과 물티슈, 휴지, 볼펜, 물통이 놓여있다. 창가 쪽에는 전신 거울과 풀업바, 푸시업바, 작은 테이블, 쌓여있는 책들이 보인다. 음... 무엇을 배낭에서 빼야할까. 으아. 어느 것 하나 뺄 게 없는데 말이지.이러다간 한 달에 1개 버리기도 벅차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