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주말이면 서점에서 위안을 얻곤 한다. 그런데 유독 오늘따라 서점에 가자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어질 했다. 에세이 코너와 자기계발 베스트셀러 코너를 연달아 다녀간 뒤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에세이 베스트셀러 코너가 보였다.제목들을 유심히 살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마음먹고 < 참 소중한 너라서> <적당히 가까운 사이>로 지내기로 한 뒤 <오늘은 이만 좀 쉴게요>라고 회사에 말하고 왔는데 집에 가자마자 <죽고 싶은데 떡볶이는 먹고 싶어> 지다가 문득 <혼자가 혼자에게>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했다>. 책 제목만 읽었을 뿐인데 한 편의 서사가 완성되는 기분. 제목만으로 벌써 세상 모든 위로를 다 받은 느낌.
에세이 베스트셀러 코너
옆쪽 자기계발, 경제/경영 베스트셀러 코너로 자리를 옮겼다. <멘탈 체육관>에 가서 <시작의 기술>을 배워 <5년 후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고민한 결과 <나는 무조건 합격하는 공부만 한다>고 마음먹은 뒤부터 <부자의 언어>와 <돈의 속성>을 익혀 <부의 추월차선>을 타기 시작했다. 제목만 봐도 성공한 한 기업 회장님의 일대기를 들은 것 같다.가슴 깊은 곳부터 열정이 샘솟는 것 같다.
자기개발 베스트셀러 코너
바로 옆으로 책 코너를 옮겼을 뿐인데, 남에서 북으로 국경을 넘듯 완전히 반대되는 세상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었다.<오늘은 이만 좀 쉴게요> 에세이집에서는 '노력해도 결과는 배신할 수 있다'라고 하는데 <나는 무조건 합격하는 공부만 한다> 자기계발서에서는 '매일 세 시간 자고도 공부할 수 있었던 비결'을 가르친다. <적당히 가까운 사이> 에세이집에서는 '관계의 거리두기 기술'을 외치지만 <부의 추월차선> 경제/경영 서적에서는 '고객에게 충성하라'고 강조한다. 두 코너의 세계관이 서로 타협하기 어려운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지금 21대 대한민국 국회의 여당과 야당 같다고나 할까.
오늘 유독 혼란스러웠던 건 최근 베스트셀러 순위의 상당한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2, 3년간은180석 넘는 여당이 야당을 압도하듯1위에서 10위를 에세이집이 도배했다. 나를 사랑하려면 나를 혹사시켜선 안된다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퍼져서 일까. '자존감'을 필두로 "너는 너 자체로 소중해", "일에 미쳐서 너를 잃지 마", "괜찮지 않다고 해도 돼" 같은 위로가 주요 화두였다. 100석 남짓한 야당이 숨죽이고 있듯 자기계발, 경제/경영 서적이 낄 자리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경제/경영 베스트셀러 코너
철옹성 같았던 에세이집의 성벽도 최근 자기계발, 경제/경영 서적으로 인해 야금야금 허물어져 갔다. 5권이 에세이집을 제치고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포진했다. 지난해만 해도 경제/경영 서적은 모두 10위권 밖이었다. 지금은 <존리의 부자 되기 습관>이 베스트셀러 1위다. MB정부에서 '경제', 문재인 정부에서 '정의'가 시대적 요구였으며, 그 요구에 맞는(맞는 것으로 보였던) 정치인이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자존감'에서 '재테크'로 점점 옮겨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 최근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 광풍인 시대 흐름과 분명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스트셀러든 정치든 거대한 시대적 물결을 한 개인이 거스르기란 여간 쉬운 일은 아닌듯 하다.
이제야 에세이집과 자기계발 서적은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보였던 여야가 반반씩 의석을 차지하고 치고박고싸우는 것처럼 팽팽한 균형감을 유지하는 듯하다. 몇년 만에 생겨난 두 코너의 양분된 긴장감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린 건 아닐까. <적당히 가까운 사이>를 두고 <부의 추월차선>을 탈 수는 없는 것인가? <죽고 싶은데 떡볶이는 먹고 싶어> 져서 <나는 무조건 합격하는 공부만 한다>고 양립할 수는 없을 걸까? 국회에서 여야 협의를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자기계발 에세이', '경영/경제 에세이'처럼 강제로라도 혼종의 코너를 하나 만들어주면 안 되려나?
자기개발 서적과 에세이집이 함께
서점에 들르면 보통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정도는 사 오는 편인데, 오늘만큼은 빈손으로 서점을 빠져나왔다. 혼란이 좀 가라앉으면 다시 다녀올 참이다. 어쩌면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의 이유를 비겁하게 책들을 탓하며 변명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5년 후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몰라서, <오늘은 이만 좀 쉴게요>." 지금 내 마음은 이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