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용 Mar 24. 2020

다른 사람에게 지우개를 쥐어주지 말자

내 손으로 지워야 할 때는 어지간히 적당해야 아름답겠다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나는 어느 작은 화방에서 미술을 배웠습니다. 그 화방은 무명의 화가 부부가 운영했습니다. 그 날은 정물을 그렸습니다. 나는 한 시간에 걸쳐 그림을 완성한 뒤 화가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은 나의 어줍은 그림을 훑었습니다. 나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는 커다란 미술용 지우개로 나의 그림을 모두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광경을 충격적으로 지켜봤습니다. 선생님은 그 위로 정물을 다시 그렸습니다. 선생님이 그린 그림은 너무도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도 그 일을 베어 물 수 있을 만큼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나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지우개로 다른 사람의 그림을 지우고, 내 눈에 완벽해 보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무의식적으로 너무나 빠르게 일어나는 일이라서,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에겐 도움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아픔이었을지요.


문제는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일 때입니다. 초등학생에게 완벽한 그림을 바라지 않듯 누구도 나에게 완벽한 글을 바라지 않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무엇보다도 나였습니다. 꼭 글뿐이겠습니까. 나에게 모든 면에서 완벽함을 요구해왔던 사람도 나였습니다. 오른손에는 연필을 왼손에는 지우개를 쥔 채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그런 상념을 짊어졌습니다.


나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불완전함을 연습해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인지도 모를 연습을, 그저 묵묵히 그러나 혼란스럽게 수행해온 것입니다. 그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로 다른 사람에게 지우개를 쥐어주지 말자. 둘째로 내 손으로 지워야 할 때는 어지간히 적당해야 아름답겠다. 나는 당분간 이런 마음으로 지내볼까 합니다.





제가 쓴 글과 브런치 글, 음악 추천을 메일로 보내주고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눌러서 저의 메일레터를 구독해보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기억해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