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용 Mar 22. 2020

나를 기억해주세요

앤트러사이트 서교점에서


'앤트러사이트 서교점에 오면 저를 기억해주세요.'는 익명의 답장을 받았다. 커피에 대한 글을 썼을 무렵이었다. 그냥 카페도 아니고 앤트러사이트, 그것도 서교점에 오면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했다. 분명 곳에서 일하거나 단골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곳에서 자신을 기억해달라니. 조금은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쉽게 무시하고 지나기엔 '저를 기억해주세요'라는 문장이 체증처럼 식도에 걸렸다. 몇 주간 혼자 속앓이를 한 끝에 결국 내가 졌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기억하러 가기로 했다.


망원동 골목에 들어서자 멋진 카페들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공간에 들어갔다. 3층짜리, 넓은 창문이 돋보이는 건물이었다. 오래된 저택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내부는 매끄러운 나무로 포장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거친 회색 벽돌이 드러나 있었다. 마치 불상의 흘러내린 어깨를 보는듯했다. 나는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도서관처럼 조용한 분위기였다. 옆 사람들이 건축가 '이타니 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음악은 흐르지 않았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커피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어두운 색이었는데, 컵 가장자리로 갈수록 옅은 갈색이 드러났다. 컵을 코에 가까이 가져가자 옅은 시큼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시큼한 향이 미각으로 진하게 구체화되었다. 끈적하지만 전체적으로 무겁지 않은 질감이었다. 마시고 나면 혀 끝에 달짝지근한 캐러멜이 남았다. '공기와 꿈'이라는 원두명과 잘 어울렸다.


커피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엔 나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은 없었다. '여기예요'라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무엇을 바라며 이곳에 왔을까. 누가 마중이라도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그저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문장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만큼 '나를 기억해주세요'는 강력한 말이다. 우리의 삶은 기억으로 구축되며, 그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어지러운 시공간에서 일어난다. 그 혼란 속에서도 나는 '앤트러사이트 서교점'를 찾을 때마다, 혹은 빈티지 건물에 들어서거나 산미 가득한 원두향을 맡을 때마다, 이 일련의 사건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오래 기억하는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만난 적 없는 그 또는 그녀와의 이야기를 기억하기로 한다.





제가 쓴 글과 브런치 글, 음악 추천을 메일로 보내주고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눌러서 저의 메일레터를 구독해보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순간은 반딧불 무리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