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도착할 그곳까지
오늘 문득, 하프 마라톤 대회를 신청했다. 정말 ‘문득’이었다. 나는 공공연하게 하프 마라톤 완주가 버킷리스트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막상 대회를 신청하는 건 늘 망설였다. 무서웠다. 정확히 무엇이 무서운지는 몰랐다. 그냥 잘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이 앞섰다. 참 막연하지. 그러다 문득, ‘기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완주가 중요한 거 아닌가. 걸어서라도 가면 되잖아.’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미룰 이유가 사라졌다. 그리고 5분 만에 대회 참가 신청을 했다. 그동안 나는 왜 그렇게나 망설였을까. 이렇게 쉬운 일이었는데.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가로막는 건 뭘까. 완벽해야 한다는 집착, 잘해야 한다는 압박, 성취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 그건 모두 내가 만든 환상이다.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겁이 더 많아진다. 더 지혜로워져야 하는 게 아닌가? 더 과감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참 희한하다, 희한해. 이럴 때 보면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나를 온전히 이해하길 바라는 게 얼마나 큰 욕심인지. 뭐, 아무튼.
나는 결국 내가 세운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거다. 그게 요즘 나의 꿈이다. 예를 들면, 내가 만든 글쓰기 원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냥 아무 말이나 쉽게 쓰고 싶다. 막말이라도 좋다. 정갈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피카소는 라파엘처럼 그리는 데 4년이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고 했다. 아이는 색연필을 쥐고 가볍게, 쓱쓱 선을 긋는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거기엔 아무런 망설임도 없다. 나도 그렇게 글 쓰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다. 가볍게, 쓱쓱.
그러니 우선 시작을 연습하기로 하자. 마라톤 대회를 신청했으니 뛰기야 하겠지. 태어나서 한 번에 21.0975km를 뛰어 본 적은 없어도, 계속 앞으로 달려가다 보면 언젠가 도착은 하겠지. 내게 빨리 뛰라고, 꼭 두 시간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재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에게 기대하고, 나만이 나에게 실망한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달려보자. 언젠가는 도착할 그곳까지. 가볍게, 척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