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지도 못했던 사랑에 대한 장례식에 관하여 - 2
그 애의 말은 길고 길었다. 실시간으로 텍스트로 쏟아지는 그 애의 단어들과 문장들을 보면서 나는 조금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아까는 나 좋다면서, 거짓으로 꾸밀 수 없는 애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면서, 갑작스럽게 이런다고?라는 당혹감과 함께 은연중에 그 애는 내가 자신을 잡아주기를 바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B의 말하지 않은 소원과 달리 나는 그 애를 잡아주지 않았다. 잡아줘야 하는 건 그 애가 스스로 나에게 잡아달라 손을 내밀었을 때만 이었다. 그리고 그 애의 지금 겪고 있는 듯한 두려움 또한 - 두려워서 도망치는 것이라는 걸 나는 은연중에 이해를 했다. 나는 그 애에게 담담하게 인사를 건네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고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있었다.
처음으로 B를 보았을 때 걷잡을 수 없이 그 감정 속으로 끌려가던 나를 보면서 나도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전에 막 2년 동안의 연애가 끝난 참이었는데, 그것과 무색하게 그 애를 애정하는 나도 정말이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웠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주 오래된 나의 염원이 그 애를 불렀다고. 그래서 삶이 잠시 B를 내 앞에 데려다 놨다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갈망 했던 건 구걸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 나 스스로 증명해서 얻어내는 사랑이 아닌 ‘온전히 나 자신 그대로'로 사랑받는 걸 원했다. B는 꾸며내지 않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내 존재에 대해 감탄하고, 심지어 이야기 도중 한국에서 자주 듣는 농담들 - 심지어 가족들 마저 나에게 애정 어린 장난으로 '넌 좀 여기 성형수술 하면 더 예쁠 텐데...'라는 말에도 B는 정중하게 불쾌함을 표하며 너 그대로 예쁘다고 얘기한 애였다. 아무리 말과 단어들로 거짓을 꾸며내며 말한다고 해도, B의 시선이나 사소한 눈길, 손짓들은 거짓을 꾸며낼 수 없는 애정이 가득한 표현들이었다.
B는 앞서 말했듯이 독특한 아이였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정작 한국어는 하지 못하고,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쓰지만 또 다른 나라에 이주해 다중 언어를 구사하는 애였다. 본인도 누구를 만나던 스스로를 설명해야 하는 탓인지, 이방인으로써 낯선 사회에 억지로 자기를 구겨 넣어 적응해야 한 탓일까, 그 애는 겉은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아이였지만 그 속은 감각이 매우 뛰어난 섬세한 애였다.
B는 통화를 하는 도중에도, 그리고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도 자신의 모든 것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얘기해 줬다. 너에게 숨김없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얘기하는 - 어쩌면 내가 자고나란 한국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 이야기를 다 뱉어내면서 한편으로는 그 모습 자체가 조금은 폭력적으로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어린아이가 내게 다가와 내 옷자락을 살며시 그러쥐고서는 '나 이런 짓도 했고 이런 것도 했는데 그래도 너 나 사랑해 줄 거지?'라는 말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B를 미워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외피 속에 아주 말랑하고 어린아이를 본 기분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