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으로 달려가는 버스는 고요했다. 한밤 중 버스 안에서 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맨 앞좌석 위에 달린 TV도 스크린만 켜져 있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정적이 흐르는 버스 안에서 나는 부산스럽게 눈을 굴렸다. 달이 얼마나 기울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나는 종종 달을 보고 오늘이 음력으로 며칠인지 맞춰본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매일 조금씩 차오르다 이내 비워지는 달을 사랑한다는 나만의 표현 방식이다. 오늘은 다행히도 날씨가 맑아서 버스에서도 달을 볼 수 있었다. 실처럼 얇아진걸 보니 음력 30일이 분명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29일이란다. 솔직히 정확히 맞추지 못해서 실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실 같은 달이 하루 동안 더 비워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동시에 기뻤다. 내일 저녁에는 더 날씬해진 달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달멍을 때리다 보니 어느새 부산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갔다. 숙소는 런던에서 룸메이트로 같이 지내던 동생이 살고 있는 해운대 근처로 잡았다. 내가 부산에 있는 동안 서로 시간이 되면 잠깐이라도 보기로 했다. 저녁 9시가 넘어서 도착한 숙소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상연락망으로 전화를 하니 직원이 로비로 내려왔다. 절벽처럼 평평하게 눌린 뒤통수와 짜증이 박힌 미간을 보니 자다 일어난 모양이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몇 번이나 숙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어렵게 받은 카드키를 받아 방으로 올라가 보니 짐이 하나도 없었다. 4인실을 혼자 쓰게 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 노트북을 꺼내서 백예린의 Rest를 틀었다. 푹신한 솜이불이 덮인 침대 위에 누워서 눈을 감고 가만히 노래에 집중했다. 청량한 백예린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바람에 살랑거리는 커튼과 한가로운 카페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떠올랐고, 유난히 이 가사가 귀에 박혀 계속해서 맴돌았다.
Oh, I just wanna be free
난 그냥 자유롭고 싶어
off the ground, off the wall and I
땅 위에 떠서, 별나게 말이야
오늘 밤은 조금 더 자유롭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술 생각이 났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술 한 잔 마시면 더없이 행복할 것만 같았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마침 숙소 근처에 바이닐 펍(VINYL PUB)이 있었다. 바이닐 펍은 LP(레코드판)으로 음악을 틀어주는 술집을 말하는데 나는 음악을 안주로 파는 술집이라고 표현한다. 바이닐 펍에서는 DJ들이 정성 들여 음악을 안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음악을 흘러가는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는 술집과는 분명히 다르다. 오늘처럼 술과 음악이 땡기는 날. 바이닐 펍을 눈 앞에 두고 얌전히 숙소에만 박혀 있을 순 없었다. 평소라면 벌써 잠이 들었을 시간이었지만, 땀에 절은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바이닐 펍 입구에 도착하니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오아시스, 비틀즈, 퀸 등 올드팝 뮤지션들 사진이 가득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흰색 손수건으로 컵을 닦고 있던 직원이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용히 바 테이블 구석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바이닐 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 떼가 묻어 너덜거리는 레코드 판들이 많이 보였다. 은은한 조명 아래서 돌아가고 있는 턴테이블과 얼마나 오래됐는지 수북이 먼지가 쌓인 라디오를 보니 제대로 된 바이닐 펍을 찾아온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컵을 모두 닦은 직원은 메뉴판을 가지고 왔다. 메뉴판을 보니 세상에 있는 술은 전부 파는 것 같았다. 도저히 혼자서 결정할 수 없어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위스키는 부담스럽고 맥주는 심심한 기분이 드는데, 뭘 마시면 좋을까요?" 내가 하고도 참 까다로운 질문이네 싶었다. 그런데도 직원은 한 손으로 턱수염을 슥슥 만지면서 열심히 고민하더니 하이볼을 추천했다. 그 순간 소맥을 말고 있던 내 앞에서 하이볼을 찬양하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래, 얼마나 맛있는지 한 번 마셔보자!"
입맛을 다시며 하이볼을 기다리고 있는데, 인도 정통 악기인 시타르의 통통 튀는 스트로크 연주와 함께 'I once had a girl'라는 가사가 들렸다. 한 없이 행복해지고 싶을 때 듣는 노래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내가 노르웨이의 숲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동양 악기의 전통적인 소리와 서양 뮤지션의 감수성이 만나 독특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가사에 담긴 이야기가 순수하고 유치해서 좋다. 이야기는 찌질한 백수 남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의 집에 초대를 받게 된다. 둘은 카펫 위에 앉아 와인을 마시면서 새벽 두 시까지 대화를 나누긴 하지만, 남자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욕조에서 혼자 잠든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니 여자는 이미 회사로 나가고 없다. 능력도 없고, 속도 좁은 이 찌질남은 복수심을 참지 못하고 그녀가 아끼는 노르웨이산 가구를 불태워버린다. 언제든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면서 이 귀여운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슥~하고 올라가 잔뜩 행복해진다.
the Beatles - Norwegian Wood
I once had a girl
한 번은 여자를 사귀었어
Or should I say she once had me
그녀가 날 유혹한 건지도 모르지만
She showed me her room
그녀는 나에게 자리 방을 보여줬지
Isn't it good Norwegian wood?
노르웨이산 가구, 참 멋지지 않아요?
She asked me to stay
그녀는 나에게 함께 있겠냐고 물었어
And she told me to sit anywhere
그리곤 아무 데나 앉으라고 했지
So I looked around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어
And I noticed there wasn't a chair
그런데 의자는 찾을 수가 없었지
I sat on a rug biding my time
나는 그냥 카펫에 앉았어
Drinking her wine
그녀의 와인을 마시면서
We talked until two and then she said
우리는 새벽 2시까지 이야기를 나눴고,
"It's time for bed"
그녀는 잘 시간이라고 말했어
She told me she worked
그녀는 아침에 일을 한다고 말했어
In the morning and started to laugh
그러면서 웃기 시작했지
I told her I didn't
나는 그녀에게 아니라고 말했지
And crawled off to sleep in the bath
그리고 욕조에 들어가 잠에 들었지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그런데 깨어보니 나 혼자더라
This bird had flown
그녀가 떠나버린 거지
So I lit a fire
그래서 나는 불을 붙였어
Isn't it good Norwegian wood?
노르웨이산 가구, 참 멋지지 않아요?
노르웨이의 숲이 끝나자 기다리던 하이볼이 나왔다. 손잡이가 달린 큼직한 유리컵에 담긴 하이볼을 스틱으로 휘~휘~ 저어 위아래의 농도를 일정하게 맞췄다. 하이볼에 동동 떠다니는 얼음들은 서로 부딪히면서 달그락하는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잔을 들어 하이볼을 한 모금 마시니 입안에서는 떫은 위스키 맛이 났고, 목에서는 탄산이 난리 부르스를 쳤다. 하이볼의 강렬한 목 넘김이 사라지고 나면 코 끝으로 레몬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앉은자리에서 5분 만에 하이볼 한 잔을 해결하고, 바로 한 잔을 더 주문하고 보니 하이볼은 충분히 찬양할만한 술이었다. 오늘만큼은 소주도, 맥주도 심지어 소맥도 하이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음악을 안주 삼아 하이볼의 신세계를 맛보고 있는데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들어왔다. 한 사람은 파란색 운동복 위에 검은색 패딩을 입고 있었고 반대로 다른 사람은 깔끔한 캐주얼 정장을 맞춰 입고 들어왔다. 두 남자는 바이닐 펍에 들어와서 한 동안 앉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바이닐 펍에 처음 온 사람들 같았다. 결국, 직원의 도움을 받아 바 테이블 옆에 있는 소파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손을 들고 맥주를 6병 시켰다. 주문을 받은 직원은 맥주와 함께 '신청곡 카드'를 가져다줬다. 문제는 딱 한 장만 가져다줬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두 남자는 신청곡 카드에 적을 노래를 선정하기 위해 치열한 토론을 시작했다. 조용필, 이승철 등 가요부터 시작해서 퀸, 비틀즈 팝송까지 누구나 한번 정도는 들어본 노래들이 후보로 올랐다. 그중에서 결승까지 올라간 건 스티비 원더의 isn't she lovely와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이다. 두 노래 중에 죽기 전에 한 곡만 들을 수 있다면 무슨 노래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라면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할 수 없어 고민만 하다가 결국엔 한 곡도 듣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두 남자도 나 같은 사람이었다. 신청곡 카드는 하나지만 이 두 곡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이 두 남자는 비장한 표정으로 직원을 찾아갔다. 소파에서 서로를 죽일 듯 토론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졌다. 누구보다 공손한 자세로 서서 직원에게 두 곡 모두 신청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진심으로 물어본 사실이 어색해질 정도로 직원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내 머쓱해진 둘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피식거리면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반대편 소파 자리에는 커플이 앉아 있었다. 편안하게 턱을 괴고 앉아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있는 대로 허리를 굽혀 여자에게 무엇인가 해명하고 있었다. 음악이 하나가 끝나고 다음 음악으로 넘어갈 때마다, 공간을 떠다니던 음표가 바닥으로 떨어져 잠시 조용해졌다. 그 순간 남자의 탁음 섞인 절실한 목소리가 멀리서도 들렸다.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이 남자는 손과 발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일본어로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운 게 전부인 나지만, 한 문장이 시작될 때마다 '와따시와'가 빠지지 않는 것을 보니 오해를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자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무시하자 남자는 결국 폭발해서 한국말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여자도 그제야 일본어로 받아쳤다.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소리 높여 싸우다가 서로 지쳤는지 정적이 흘렀다. 이 절묘한 타이밍에 isn't she lovely가 흘러나왔다. 끈적거리는 스티비 원더의 목소리와 경쾌한 비트는 순식간에 분위기를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남자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가리키며 여자에게 들어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음악을 듣고 있다는 표현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는 다시 허리를 굽혀 꿀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을 하고선 일본어로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노래가 2절로 넘어가는 간주에서 여자가 옆으로 와서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남자는 급한 마음에 책상을 뛰어 넘어가려다 자빠졌고, 여자는 그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새로 주문했던 하이볼까지 모두 해결하니 제법 알딸딸해졌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바다 모래사장에서 양팔을 벌리고 한바탕 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이 아니면 이런 미친 짓을 언제 해보겠냐는 마음으로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데, 입구에 신청곡 카드가 보였다. 바이닐 펍에서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는 친구들과 연인들이 서로를 더욱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Maria carey - all i want for christ mas’를 적었다. 신청곡 카드를 받은 직원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꼭 틀어 드릴게요."라고 말했다. 바이닐 펍에서 나와 바다 모래사장을 한참 뛰어다녔다. 차가운 칼바람이 불었지만 따뜻한 콧노래는 끊이질 않았다.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크리스마스에 필요한 건 오직 당신이에요
음악을 안주로 파는 술집 편에서 소개된 음악들
백예린 - Rest (https://www.youtube.com/watch?v=IqfFZ5cJ-WU)
the Beatles - Norwegian Wood (https://www.youtube.com/watch?v=Y_V6y1ZCg_8)
Stevie Wonder - Isn't She Lovely (https://www.youtube.com/watch?v=IVvkjuEAwgU)
Michael Jackson - Billie jean (https://www.youtube.com/watch?v=Zi_XLOBDo_Y)
Maria carey - All i want for christmas (https://www.youtube.com/watch?v=aAkMkVFwA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