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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피플 Aug 18. 2020

미술관 두 배로 즐기는 방법

오랜만에 마신 하이볼 덕분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아 누군지 확인도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형, 어디세요? 아직 부산이세요?" 런던에서 1년 동안 같이 동거 동락했던 동생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은 아침부터 학교 도서관으로 출근해서 공부를 하고 점심을 먹으려는데, 부산에서 여행을 하고 있는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엔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미안했고, 내가 부산으로 여행을 간다는 말을 기억하고 전화를 해줘서 고마웠다. 반대로 내가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나름의 보답으로 동생에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사주겠다고, 무엇이든 말해보라면서 호언장담했다. 그러자 동생은 '음~'하고 소리를 내면서 잠시 고민하더니 장산역으로 오라고 말했다.



장산역에 도착하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장산역 2번 출구에서 남색 삼단 우산을 들고 있는 동생이 보였다. 운동을 얼마나 했는지 삼단 우산이 장난감처럼 보일만큼 덩치가 커졌다. 그런데 눈썹을 가릴 만큼 두꺼운 뿔테 안경 사이로 보이는 가느다란 눈은 여전했다. 동생은 지하철역에서 올라오는 나를 보고 귀여운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우산을 접지도 않고 동생을 끌어안았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동생이 제일 좋아한다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서울 촌놈인 나는 장산역 근처에 무슨 대단한 식당이 있는지 알리가 없었다. 평소라면 속으로 '제발, 소고기만 아니길' 하고 잔뜩 쫄았을테지만, 오늘만큼은 소고기가 아니라 참치라도 거침없이 카드를 긁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동생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응원이었으니까.


우산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소나기 사이를 뚫고 걷다 보니, 큰 창문 너머로 비 오는 풍경을 보면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 보였다. 레스토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그래, 오늘 날을 제대로 잡았구나. 아주 대견해! 하는 마음으로 동생에게 물었다. "네가 좋아한다는 식당이 여기야?" 그러자, 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니요, 제가 좋아하는 식당은 반대편에 있는 불고기집인데요." 하고 대답했다. 동생이 가리키고 있는 식당은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있는 허름한 기사 식당이었다. 심지어 식당 안에는 사람은커녕 파리 한 마리도 없었다. 식당을 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부실하게 올린 내 비장한 각오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런 내 심정을 동생은 모르는 건지. "형님, 불고기 싫으시면 여기 육회비빔밥도 맛있어요."하고 실없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얄미운 동생의 등짝을 후려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참 너답다. 너다워!"


식당 문을 밀자 '띠링띠링띠링' 하는 청량한 소리가 났다. 문에 작은 종이 달려있었다.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는 종소리를 듣고 나와 식당에서 가장 구석진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주머니는 물통을 내밀면서 나에게 무엇을 먹을 건지 물었고,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동생을 쳐다봤다. 동생은 본인이 정말로 좋아하는 식당임을 증명하듯 의연한 표정으로 불고기 1인분과 육회비빔밥을 주문했다. 손님이 들어온 지 30초 만에 주문을 받아낸 아주머니는 주방을 향해 "불고기 하나, 육회비빔밥 하나!"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주방에선 부산스러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밑반찬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괜찮은 반찬들이 나왔다. 길쭉하게 찢어진 배추김치는 물론이고 싱싱한 콩나물과 시금치, 양념이 제대로 벤 꼬막과 게장이 밑반찬으로 나왔다. 심지어 두부와 애호박이 듬뿍 들어간 된장찌개와 두툼한 육전을 서비스로 주셨으니, 이제는 밑반찬이 아니라 찐반찬이라고 불러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찐반찬만으로 밥 한 공기를 싹싹 긁어먹었다. 이어서 스테인리스 양푼에 푸짐하게 담긴 육회 비빔밥과 간장과 설탕으로 달콤 짭짜름하게 양념된 불고기가 나왔다. 숟가락으로 육회 비빔밥을 퍼서 그 위에 바싹 익힌 불고기를 얹어서 한 입 먹는 순간, 동생의 등짝을 후려친 게 진심으로 후회됐다. 나는 사과하는 마음을 담아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꽉 움켜쥐고 육회 비빔밥을 누구보다 맛있게 퍼 먹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동생에게 연신 따봉을 날렸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동생이 "형, 미술관 갈래요?" 하고 물었다. 우리는 런던에서도 종종 미술관으로 놀러 갔다. 동생이나 나나 미술 작품이나 역사에 대해선 쥐뿔도 몰랐지만, 미술 작품을 보면서 작가가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일지 상상하는 일에 큰 재미를 느꼈다. 영국 런던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생각과 행동을 절제하면서 살아가던 우리도 미술관에서 만큼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미술관 가자는 동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좋다고 답했다. 동생은 내가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전시가 있다면서 나를 부산시립미술관으로 데려갔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오래된 질문>라는 이름으로 부산 작고 작가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 안내서를 읽어보니 16명의 부산 작고 작가의 작품들을 동시에 전시함으로써 '부산 미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고자 한다고 적혀있었다. 안내서를 읽었는데도 부산 미술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전시 자체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전시를 기획한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런던에서 하던 대로 자유롭게 상상하며 미술 작품을 즐기기로 했다.


조동벽 - 해녀 (출처: 부산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사로잡은 작품은 <조동벽 작가의 해녀>다. 이 작품은 푸른 바다가 보이는 모래 해변에 누워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세 명의 여인을 담고 있었다. 여인들을 자세히 보니 하나 같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두 명은 팔을 머리에 대고 깊은 고민에 빠진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이 작품을 보고 동생에게 "이 사람들은 무슨 고민을 하고 있길래 이리도 심각할까?"라고 화제를 던졌다. 그러자 동생은 해녀들과 똑같은 포즈를 취하면서 상상을 하더니 "혹시, 오늘 뭐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순간 미술 작품이 콩트처럼 살아 움직였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웃음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리고 동생에게 아직 실력이 죽지 않았다며 진심으로 칭찬을 했다. 다음 작품은 조잘조잘 쉴 틈 없이 떠들던 우리를 조용히 사색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파란색과 초록색 사이의 푸른 색조 물감을 특정한 패턴 없이 자유롭게 사용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형태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한참을 작가가 무엇을 그린 건지 상상을 하다가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다. 나는 바닥에 있는 알록달록한 조개가 보이는 맑은 바다라고 말했고, 동생은 황소자리가 빛나는 초여름 밤하늘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상상력에 놀라 다른 사람들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작게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다. 그리고 이 순간의 즐거움을 오래도록 즐기기 위해 이 작품의 해설만큼은 보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누구보다 자유롭게 미술관을 즐기고 있지만, 나도 처음부터 미술관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중학교 시절에 미술관으로 견학을 간 적이 있는데, 지도 선생님에게 조용히 하라는 주의를 수 없이 받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미술관은 말을 하면 혼나는 불편한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나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방문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내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술관 바닥에 편하게 드러누워 도화지에 작품을 따라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작품에 대해 열렬하게 토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술관을 둘러보니 혼자서 조용히 관람하는 사람보다 친구, 연인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는 그날 각자의 방식대로 미술관을 자유롭게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십 년 동안 갇혀있던 미술관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16명의 부산 작고 작가의 미술 작품들을 모두 돌아보니 마감시간이 됐다. 비록 전시를 보고 기억에 남는 건 해녀 하나밖에 없었지만, 동생과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 마감 시간인 6시가 넘었다는 직원의 성화에 우리는 부랴부랴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나왔다. 노을이 지고 저녁이 찾아오자 부산에는 달빛이 내려 앉았고, 동생은 "형, 오늘 고마워요."라는 따뜻한 말을 남기고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아쉬운 마음에 "저녁은 먹고 가야지."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 떠나가는 버스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동생이 떠나고 숙소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문자가 한 통 왔다. "형, 아까 그 작품 금강산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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