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서 나와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오후의 강렬한 햇살이 내려앉은 푸른 바다와 바다 위를 유랑하는 알록달록한 배들. 모두 어제 걸으면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라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그 길을 걷고 있는 내 마음의 온도는 조금 차가웠다. 그 이유는 단지 오늘의 날씨가 유난히 쌀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오늘이 완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서 그럴 것이다. 덕분에 나는 어제 보다 오늘 두배는 멀리 걸을 수 있었다. 오묘한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음미하며 걷다 보니 고요한 풍경은 사라지고, 분주한 풍경이 찾아왔다. 말린 고추를 비닐에 한가득 가지고 나와 팔고 있는 할머니들, 트럭에 잡동사니를 늘어놓고 장사를 하는 할아버지를 보니 오일장이 열린 시장이 분명했다. 우연히 발견한 시장에 도착하니 어제 장도 정상에 누워서 했던 다짐이 뒤늦게 생각났다. "아, 맞다. 나 어제 저녁으로 국수 먹기로 했지?"
하루가 지나고 점심이 되고 나서야 먹을 수 있게 된 국수.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 국수랑 지짐이랑 ] 라고 적힌 간판 밑에서 붉은색 두건을 쓰고 국수를 삶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의 안경에는 삶은 국수에서 올라오는 온기로 김이 서려 있었다. 국숫집에 있는 손님들은 서로 등을 마주하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6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식탁에 마침 5명이 앉아 있었다. 주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가 국수를 삶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할머니가 정성스레 만들어주신 국수를 먹으면서 시장을 돌아다니는 동네 사람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문제는 잔치 국수를 먹을지, 비빔국수를 먹을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잔치 국수의 시원하고 얼큰한 매력과 비빔국수의 달콤하고 매콤한 매력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은 매번 행복하면서 동시에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오늘은 추운 날씨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잔치 국수를 먹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주문을 한 지 1분 정도 지났을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치 국수가 나왔다. 흰색 면발 위에는 국물의 칼칼함을 더해주는 대파는 물론이고 큼직하게 잘린 어묵 조각들도 올라가 있었다. 할머니에게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잔치 국수와 단무지, 배추김치를 쟁반에 담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국수를 돌돌 말아 숟가락 위에 올리고 그 위에 어묵과 김치를 순서대로 얹어 한 입에 넣는 순간! 잔치 국수를 먹기로 결정한 내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씹자마자 부서지는 국수의 심심한 식감을 아삭한 김치와 묵직한 어묵이 확실히 잡아주었고, 진하게 우려진 국물은 차갑던 내 몸의 온도를 조금씩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시장을 조금 더 돌아보기로 했다. 여수에서 찻집을 발견한 것처럼 완도에서도 재미있는 경험을 마주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다 시장 구석에 모여있는 수상한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의 빨간색 모자를 쓰고 있었고,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남자를 따라다녔다. 뭐하는 사람들이지? 하는 호기심으로 다가가 물어보니 수산물 경매 현장이라고 했다. 물고기가 가득 담긴 노란색 바구니 앞에서 경매자가 호루라기를 짧게 불면, 사람들은 메모지에 희망 가격을 적어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원하는 가격에 신선한 수산물을 사기 위해 몇 번이고 손을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서로 적나라하게 쳐다보진 않았지만, 곁눈질하면서 은근히 서로를 견제했다. 그러다 더 높은 가격이 적힌 메모지가 올라오지 않으면 경매자는 호루라기를 길게 불고 경매를 종료했다. 낙찰받지 못한 사람은 경매자를 따라 다음으로 넘어갔고, 낙찰받은 사람은 노란색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수산물 경매 현장이 신기해 호루라기 소리가 지겨워질 때까지 한참을 구경했다.
수산물 경매 현장 입구에는 고기잡이 배가 정박된 간이 부두가 있었다. 육지와 부두를 연결해주는 목재 다리를 건너니, 배를 정비하고 있는 노부부가 보였다. 파란색 고기잡이 배 안에는 노부부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할머니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말없이 각종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일초도 쉬지 않고 투덜거리며 간이 부두에 연결된 닻을 풀어 출발할 준비를 했다. 나는 노부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혹시,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세요?" 갑자기 나타나 이상한 질문을 하는 나를 보고 할머니는 고개를 잠깐 들었다 바로 다시 숙였고, 할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 "집에 가지, 어딜 가."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의 무심한 대답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평생 바퀴 달린 자동차나 타고 다니던 나에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집에 가는 모습을 상상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그 대답을 시작으로 바다 사람 이야기를 이어갔다. 보통 물고기를 잡기 위해 얼마나 일찍 바다로 출발하는지, 날씨가 추운 겨울에는 무슨 물고기가 잡히는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바다에 사는 할아버지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내게는 참 생소했다. 반면 모든 정리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할머니는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집에 좀 갑시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왠지 모를 힘이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게 인사를 하고 다시 배에 올라탔다. 배에서는 부웅~ 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시동이 켜졌고, 뱃머리가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반대편으로 돌아간 배는 덜~덜~덜~ 하는 소리를 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움직이는 배를 따라서 점차 넓어지는 파도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할머니 할아버지에 인사를 드릴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결국,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고 "안녕히 가세요!"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뱃머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와 조종석에 서 있던 할아버지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완도에서의 여행을 마무리를 하고 부산으로 떠나기 위해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 도착하니 로비 카페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빨간색 모자가 아니라 빨간색 옷을 맞춰 입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장님 지인의 생일 파티를 하나 짐작했다가, 누군가 피아노로 연주하는 '흰 눈 사이로'라는 캐럴을 듣고 나서야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걸 깨달았다. 초록색 트리가 달린 빨간색 옷을 입고 있던 사장님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황급히 올라왔다. 얼마나 여행에 집중을 했으면 오늘이 크리스마스 인지도 몰랐을까. 어이가 없어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다시 조용해진 방에서 짐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혼자서 여행을 하는 건 낭만적이지만,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건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니 울적한 마음은 두배가 됐다. 차라리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크리스마스라고 인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마지막으로 사장님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기 위해 크리스마스 파티가 한창인 로비로 내려갔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키를 반납하고 숙소를 나왔다. 숙소에서 두 발자국 정도 걸었을까. '딸랑'하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숙소 문이 열렸다. "저기요~ 잠깐만요!" 방금 인사를 나눈 사장님이 나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내 손에 크리스마스 트리 하나를 쥐어주셨다. 사장님이 만든 수제 비누라고 했다. 나는 행복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크리스마스 트리와 사장님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봤다. 그러자 사장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쩌면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낭만적인 크리스마스 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