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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피플 Sep 05. 2020

지하철보다 버스가 좋다

부산에 도착하고 시내를 돌아보는데 버스를 자주 이용했다. 동생을 만나서 미술관에 갔을 때도, 해운대 달빛 축제에 갔을 때도, 필름 현상을 위해 사진관에 갔을 때도, 매번 숙소로 돌아올 때마다. 옅은 남색 띄를 두른 버스를 타고 자유롭게 부산을 누비었다. 나는 지하철보다 버스를 좋아한다. 특히 새로운 도시로 여행을 떠나 시내를 돌아볼 때는 무의식적으로 버스를 선택한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고, 지하철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교통수단이다. 반대로 버스는 오래 타고 있으면 꿀렁거림 때문에 멀미까지 난다. 그런데도 나는 왜 지하철이 아니라 버스를 고집할까? 생각만 하니 알 듯 말 듯 알쏭달쏭했다. 그래서 직접 부산 시내를 순환하는 남색 버스 위에서 내가 버스를 좋아하는 이유를 적기 시작했다.



1. 창문 밖으로 풍경을 볼 수 있다.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에는 네모난 창문이 있다. 아니. 버스는 네모난 창문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버스에 올라타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고 있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새로운 도시에서 버스를 타면 눈이 더욱 즐겁다. 빙빙 돌아가는 버스 바퀴 속도에 맞춰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일상 속 도시와 비교를 한다. 도시를 채우고 있는 건물들은 무슨 모양인지, 세월의 흔적이 얼마나 묻어 있는지, 도로 양옆으로 나란히 자라난 나무들의 잎은 무슨 모양으로 피었는지, 도시 중심을 가로지르는 천이나 강은 없는지, 사람들은 무슨 표정과 자세로 거리를 돌아다니는지, 버스에 앉아 차분하게 창문 밖 풍경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나 정말 여행하고 있구나."하고 여행하는 순간을 실감하게 된다. 그 순간만큼은 쿵덕쿵덕하는 꿀렁임도 콩닥콩닥하는 설레임으로 바뀐다.


2. 마음이 평온해지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모든 계절의 바람을 좋아한다. 심지어 추운 겨울날의 칼바람도 따뜻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언제든 바람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내 자전거를 타는 이유도 바람 때문이다. 보통 내 안에 피어나는 감정들은 잠시 타올랐다 사라지는데, 종종 그대로 방치하면 폭발할 것만 같은 감정들이 피어난다. 나는 그럴 때 한강에서 자전거를 탄다.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으면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다. 여행을 하면서 지하철이 아니라 버스를 고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버스에서는 누구나 창문 하나쯤은 열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하지만 지하철에서는 바람을 맞겠다고 창문을 여는 순간, 바람이 아니라 사람들한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버스에서도 창문을 우리 집 대문처럼 활짝 열어두고 뒤에 앉은 사람의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버린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살짝 열어둔 버스 창문 틈으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내 얼굴을 스치듯 지나가며 특별한 일이 없던 시시한 여행도 만족스럽게 만들어준다.



3. 버스 기사님들의 수신호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버스를 혼자 타기 시작한 건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다. 집에서 5km나 떨어진 중학교를 도저히 짧은 다리로 걸어갈 수가 없어서 마을버스를 타고 다녔다. 엄마 없이 오롯이 혼자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는 길은 매일 새로웠다. 버스에서는 우리 집이나 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차림새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날씨나 계절이 달라질 때마다 버스 창문 밖 풍경도 변했다. 그러다 하루는 정말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했다. 버스 기사님 바로 뒷좌석에 앉아 하교를 하던 날이다. 내 앞에 앉아 있던 버스 기사님이 반대편에 같은 번호의 버스 기사님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반대편의 기사님도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 엉뚱한 수신호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집 앞에서 내리지 않고 노선을 한 바퀴 더 돌았다. 버스가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버스 기사님은 10번도 넘게 손을 흔들어 수신호를 보냈다. 알고 보니 내가 학교에서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면 건네는 인사처럼. 버스 기사님들도 반대편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기사님이 지나가면 손을 흔들어 인사를 나눈다고 했다. 승객들을 태우고 있기에 버스를 멈출 순 없으나 수신호로라도 반가움을 표현하고 싶은 버스 기사님들의 마음. 작고 사소하지만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우연히 버스 기사님들의 수신호를 발견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환하게 번진다.



4) 숫자 놀이를 즐길 수 있다.

도로 위에 있는 차라면 모두 네 자리 수의 번호판을 가지고 있다. 버스를 타면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많은 차량 번호판을 관찰할 수 있다. 보통 차량 번호판은 특별한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종종 도심 속 밤하늘 위의 초승달처럼 빛나는 규칙을 가지는 번호판도 존재한다. 버스에서 하는 숫자 놀이란 규칙을 가지는 차량 번호판을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제일 간단한 규칙은 1111, 2222, 3333처럼 같은 숫자가 반복되는 것이다. 워낙 희귀한 번호판이라 실제로 발견하기는 가장 어렵다. 2468처럼 같은 수만큼 더해지거나 1369처럼 같은 배수로 곱해지는 숫자들도 간단한 규칙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로 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차량 번호판은 3508이나 8643 같은 정체불명의 숫자들이다. 정체불명의 숫자들 속에서 규칙을 만들어 내는 것. 숫자 놀이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3508에는 무슨 규칙이 있을까? 첫째 자리 숫자인 3과 둘째 자리 숫자인 5를 더한 값은 8로 셋째 자리 숫자인 0과 넷째 자리 숫자인 8을 더한 값과 똑같이 나온다. 3+5 = 0+8 이라는 규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8643은 단순히 더하거나 빼는 수준으로는 규칙을 만들 수 없다. 자세히 보니 첫째 자리 숫자인 8과 넷째 자리 숫자인 3을 곱하면 24로 둘째 자리 숫자인 6과 셋째 자리 4를 곱한 값과 똑같이 나온다. 누군가는 숫자 놀이가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은 해봤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버스에서 숫자 놀이를 하면서 속으로 킥킥댄다. "버스에서 창문 밖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나처럼 숫자 놀이를 하고 있을 거야."


5) 편하게 앉아서 이동할 수 있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있던 경험을 떠올려보자. 은색 철로 만들어진 좌석에 앉으니 엉덩이가 시리다. 점점 딱딱한 철판에 엉덩이가 뭉개져 아려온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들었다 다시 내린다. 반대편에 앉은 할아버지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호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옆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고, 몸을 비틀어 겨우 휴대폰을 꺼낸다. 언제 도착하냐는 친구의 카톡에 30분 뒤에 도착한다는 답장을 제대로 보내고 싶지만 자유롭지 못한 양팔 덕분에 오타가 가득하다. 차라리 잠이나 자보자고 눈을 감는 순간 잡상인이 등장해 박수를 치며 물건을 팔기 시작한다. 출근 시간, 미팅 시간, 약속 시간 등 제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일상만 아니라면 지옥철을 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버스는 지하철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편하게 앉아서 이동할 수 있는 최고의 교통수단이다. 일단 버스에는 일인석이 있다. 운이 좋아서 일인석에 앉게 되는 날이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오늘 아침에 들뜬 마음으로 챙긴 단편 소설을 꺼내 읽을 수도 있고, 한 동안 보지 미뤄두고 보지 못한 웹툰을 몰아서 볼 수도 있다. 일인석이 아니라고 해도 제법 넉넉한 내 공간에서 자유롭게 양팔을 움직일 수 있다.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푹신한 의자는 덤이다. 몸이 편해지니 마음도 한결 여유가 생긴다.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음악을 들어보자. 리틀 포레스트 같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친절한 승객들이 버스에서 내릴 때 기사님에게 건네는 따뜻한 인사, 버스 전용 차선으로 달릴 때 다른 차들을 추월하면서 느끼는 우월감, 버스가 움직이든 멈추든 신호는 절대로 끊기지 않는 무료 와이파이 등 노트에는 끝도 없이 내가 버스를 좋아하는 이유들이 적혀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버스를 타고 있는 줄만 알았다. 버스에 대해 고민하고 노트에 메모를 하기 전까지는, 정말이지 내가 버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렇게나 많을 줄 몰랐다. 글로 정리하니 내가 버스를 좋아하는 이유들이 명확해졌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내가 버스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버스보다 지하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버스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럼 내가 앉을 수 있는 일인석이 줄어들 테니까. 그래도 그런 사람들에게 질문은 해보고 싶다. "지하철을 좋아하는 이유가 뭐예요?" 무슨 재미있는 대답이 나올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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