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을 하루 앞두고 눈이 내렸다. 단풍나무의 낙엽이 다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유난히 일찍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에 나는 조금 설렜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로 나가는데 무슨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창문을 열었다. 순서대로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들은 모두 하얀색 눈모자를 쓰고 있었고, 사람들은 눈이 소복이 쌓인 눈우산을 들고 다녔다. 놀이터엔 엄마 손을 잡고 나와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아이도 보였고, 아파트 입구에서 사람들이 넘어질까 눈길을 빗자루로 쓸고 있는 어른도 보였다. 분명히 어제와 똑같은 세상이었고 바뀐 것은 눈 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복슬복슬한 솜사탕처럼 둥글고 포근했다.
지상 11층 높이에서 눈이 내리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보통은 땅에서 하늘을 올려 보며 눈이 내리는 걸 구경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고 있으면 눈은 엄청난 속도로 추락했다. 공기처럼 가벼운 눈이라도 워낙 빠른 속도 탓에 그 충격이 뺨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반면 11층 높이의 눈은 전혀 달랐다. 마치, 눈이 어항에 있는 물고기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눈으로 눈을 쫓아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느렸다. 눈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저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랑살랑 춤을 췄다. 그렇게 우아하게 추락하고 있는 눈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내 시간도 느리게 흘렀다. 나는 그렇게 여유롭게 눈을 보는 게 좋았다. 그 순간엔 나 스스로를 괴롭히던 문제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막상 나갈 채비를 하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걱정됐다. 뉴스에선 117년 만에 폭설이라며 나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그래도 아침 수영을 포기할 수는 없는 법. 완전 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생각보다 춥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주차장에 도착한 순간 그 생각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내 자동차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에 파묻혀 있었다. 눈으로 만든 자동차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였다. 5cm는 되어 보이는 두께로 쌓인 눈 때문에 도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먼저 맨손으로 트렁크에 있는 눈을 치우고 장우산을 꺼냈다. 얼어붙은 손이 엿가락처럼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장우산으로 자동차 위에 쌓인 눈을 치우니 그제야 문이 열렸다. 눈이 얼마나 무거우면 장우산이 구부러졌다. 간신히 자동차 시동을 걸고 앞으로 나가려는데 바퀴가 헛돌았다. 굉음만 내고 앞으로 나가질 못했다. 핸들을 이리저리 돌려봐도 자동차는 기우뚱거리기만 했다. 후진을 했다 전진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바퀴 주변의 눈까지 모두 파내고 나서야 조금씩 움직였다. 장장 30분의 혈투 끝에 주차장에서 빠져나왔고, 평소보다 1시간이나 늦게 수영장에 도착했다. 그래도 수영장에 도착하니 안도의 한숨이 났다. 다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렇게 수영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자동차 위에 다시 쌓이기 시작한 눈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깊은 짜증이 났다.
"아, 진짜!"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말을 붙이면 반짝인다. 눈에 처음을 붙이면 설레는 첫눈이 되고, 사랑에 처음을 붙이면 애틋한 첫사랑이 된다. 처음은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복권 당첨 번호를 미리 알 수 있다면 누가 설레는 마음으로 복권을 긁겠는가? 처음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를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처음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반대로 그래서 새로운 시작을 망설이게 되기도 한다. 혹시 낙첨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거란 걱정이 시작의 발목을 잡는다. 그렇다고 처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처음은 낙첨마저 새로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세상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으니까. 그건 마치 프리즘을 통과해 무지개를 만드는 빛처럼 우리의 세상을 밝혀준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면 성실은 제곱이라고 말할 순 있다. 무슨 일을 시작하면 목표의 절반을 이룰 순 있지만 목표의 전부를 이루진 못한다. 목표를 넘어 그 이상의 성과를 얻고 싶다면 반드시 성실히 해야 한다. 이 사실을 처음 깨달은 건 학창 시절이다. 중학생 때는 시험기간이 되면 공부를 시작했다. 문방구에 가서 새로운 필기도구를 사고, 책상도 깔끔히 정리하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처음부터 너무 힘을 주고 시작한 나머지 번번이 중간에 체력이 고갈되었다. 결국 끝까지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고 목표 점수를 받지 못한 적이 많았다. 반면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시험기간이 아니라 평소에 공부를 했다. 시험을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지도 않았다. 그저 매일 평점심을 유지하며 공부를 성실하게 이어갔다. 결국 내신에서 목표한 점수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지원한 대학 중 가장 좋은 대학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학창 시절에 배운 성실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나에게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는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다 성실 덕분이다.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
김연아 인터뷰 중
2010년 겨울, 동네 국밥집에서 밴쿠버 동계 올림픽을 보던 순간은 정말로 강렬했다. 당시 나는 김연아 선수도 몰랐고 피겨 스케이팅도 몰랐다.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빙판 위를 아름답게 누비는 김연아 선수를 보면서 스포츠가 이만큼 우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김연아 선수는 음악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음악의 전개에 따라 어떤 순간엔 빠르게 질주하고 어떤 순간엔 완전히 멈춰 섰다. 종종, 빙판 아래에 스프링을 숨겨둔 듯 상공으로 날아올라 두세 바퀴 도는 순간엔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다행인 건 그렇게 놀란 것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국밥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국밥이 식든 말든 숟가락을 내려놓고 김연아 선수가 빙판 위에서 예술을 펼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음악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올림픽 해설자가 금메달을 외치며 고함을 질렀다. 국밥집 사람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쳤다.
김연아 선수는 이후로 세계 신기록을 11번이나 경신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김연아 선수가 피겨 스케이팅을 잘하는 비결을 궁금해했다. 분명히 무엇인가 숨겨둔 비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기자가 김연아 선수의 운동 비결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그 대답이 담긴 인터뷰 영상이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김연아 선수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너털웃음을 먼저 지었다. 당시 김연아 선수의 표정을 보면 "밥은 왜 드시는 거죠?"라는 당연한 질문을 받은 사람 같았다. 이어 김연아 선수는 그냥 한다고 대답했다. 운동을 하는데 무슨 비결이 있냐는 것이다. 그냥 하는 거지.
나도 요즘 그냥 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수영이다. 사실 처음 수영을 시작할 땐 통증이 줄어들길 기대했다. 실제로 수영을 하면서 체력과 근력이 늘어나며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턴 수영을 한다고 통증이 더 줄어들질 않았다. 여전히 통증의 일부는 나를 괴롭힌다. 그럼에도 수영은 꾸준히 하고 있다. 이제는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수영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는 수영장으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맞는 자유로운 바람도 좋고, 수영장에 내 몸을 완전히 집어넣으면 한치의 빈틈도 없이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물의 질감도 좋고, 장거리 수영을 하다 보면 느껴지는 호흡의 한계점에서 피어나는 새싹처럼 작은 젊음이 좋다. 수영을 마치고 땅으로 올라오면 두배로 느껴지는 그 무거운 중력은 내가 지구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제는 정말로 수영이 없는 일상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다. 다시 김연아 선수의 대답을 떠올려 본다. 어쩌면, 그냥 한다는 말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말이 아닐까. 삶이 귀찮다고 오늘을 스킵할 수 없는 것처럼. 무엇인가 너무 사랑해서 오래 지키고 싶다면 먼저 삶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 같다.
돌아오자 씩씩하게 지쳐도 돼 내가 안아줄게
괜찮아 좀 느려도 천천히 걸어도 나만은 너랑 갈 거야
선우정아 _ 도망가자
그럼에도 일상을 도망가고 싶은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수영복을 챙겨 밖으로 나갈 힘조차 없는 날. 나는 그런 순간엔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를 듣는다. 물론 실제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좋겠지만, 장거리 이동이 힘든 지금의 내게 음악만큼 완벽한 여행지는 없다. 특히 <도망가자>를 듣고 있으면 고즈넉이 노을이 지는 한적한 바다가 떠오른다. 단순한 마이너 코드 위에 얹힌 선우정아의 연약한 미성이 바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쓸쓸함을 생생히 전달한다. 선우정아는 반복해서 함께 도망가자고 노래한다. 어디든 자기 손을 잡고 떠나자고 속삭인다. 그 노랫말이 외로운 내 마음을 자꾸만 건드린다. 어쩌면, 내가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위로를 받는다. 그렇게 진한 감정으로 물드는 바다 위의 노을을 상상하며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새 2절이 이어진다. 선우정아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제는 씩씩한 목소리로 함께 돌아가자고 설득한다. 나는 그 순간 깨닫는다. 내가 도망가고 싶었던 이유도 결국은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더 나은 일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나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현실을 더 잘 살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나는 음악을 통해 도망갔다 음악을 통해 돌아온다.
뜬금없이 눈물이 나거나,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인다면 비워낼 시간이 왔다는 신호다.
위로받고 싶지만, 그럴 땐 아무도 없다.
그 시간이 찾아오면 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공항에 간다.
박선아 _ 20킬로그램의 삶
나에게 에세이라는 장르의 매력을 처음 알려준 작가는 박선아다. 박선아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찾아낸 일상 속 작은 기쁨들을 글로 담아낸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공항으로 도망치는 에피소드다. 박선아는 마음이 복잡해지면 공항으로 도망친다고 했다. 공항 카페에 앉아 마음속에 있는 모든 걱정을 노트에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트를 사정없이 구겨 공항 쓰레기통에 버리고 온다고 했다. 그럼 어디론가 날아가는 사람들처럼 그 걱정도 다른 세상으로 날아간다고 했다. 그런 다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한결 가벼운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도망에 대한 편견을 마주했다. 도망은 나약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도망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었다. 도망은 소중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어 취하는 휴식이었다. 그러니, 도망의 결말은 끝이 아니다. 도망의 결말은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