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죽음 앞에서 바뀐다
지이잉-
핸드폰 단톡방에서 낯선 사람들이 보인다.
'이제 다 같이 곧 유럽 여행 가겠네요?'
아뿔싸! 유럽 여행이 내일인지 알고 여행 갈 준비를 안 하고 있었다. 급한 대로 큰 캐리어 가방에 옷을 대충 쑤셔 넣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본 멤버들의 균형은 참 극단적이었다. 가이드 한 명, 미혼 남성 7명, 기혼 여성 1명. 아마 청춘을 바라고 온 남성이었다면 참으로 유감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나 또한 청춘을 바라며 신청했었다. 만약 이 정도로 극단적인 성비 불균형인 줄 미리 알 수 있었으면 신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에 뒤늦게 현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어플을 깔아서 그들의 모임에 참가 신청을 했다. 관광이 아니라 이동 수단만 도와주는 패키지였기에 꼭 그들과 같이 다닐 의무는 없었다. 애초에 그 땅에 도착하면 가이드는 자기 숙소로 들아가고 남은 사람들만 따로 여행하는 패키지였으니 그들과 같이 여행하는 것과 달리 현지인들과 놀겠다는 생각은 지금 다시 해봐도 좋은 판단이었다. 그런 사전 준비(?)가 있었기에 다시 한번 극단적인 성비 불균형을 봤어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다 같이 만나 비행기 탑승 수속을 밟고 약간의 시간을 기다린 후에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 비행기가 내 인생을 극단적으로 바꿔버릴 열쇠가 됐을 줄은 말이다.
나는 원래 중국 유학생이었기에 비행기는 내게 있어 자동차만큼이나 친숙한 이동 수단이었다. 비행기를 타는 시간은 밤이었기에 승무원한테 작은 와인 한 병을 부탁했고 그 와인을 전부 마시고 잠에 들었다. 그동안 기껏해야 5시간 이내의 비행기만 타다가 갑자기 12시간의 비행기를 타서였을까? 비행기에서 갑자기 잠에서 깬 나는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시야는 흔들렸다. 비행기가 흔들리는 것도 아녔건만 마음은 이상하게 계속 불안했다.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그 증상들에 대해 크게 마음 쓰지 않고 다시 잠에 들었다. 맨 처음 도착지는 영국이었는데 도착해보니 주변은 매우 깜깜했다. 밤에 출발해서 12시간이나 비행기를 탔는데 아직도 밤이었던 것이다. 그때 '어? 밤이네?'라는 생각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불안증이 올라왔다. 아무 이유도 없이 불안해져 오는 마음을 애써 털어버리며 유럽이라는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잠을 청했다. 유럽 여행은 나쁘지 않았다. 영국의 건물들은 멋있었고 독일에서 먹어본 바삭한 슈바인학세와 이탈리아의 짭조름한 피자는 중국에서 먹어본 잘라먹는 양꼬치와 함께 인생 동안 먹어본 최고의 외국음식 best 3에 들기 충분했다. 다만 외국에서 술을 좀 많이 마실 때마다 이상하게 심장 박동 소리가 잘 들리고 잠을 잘 못 자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었다. 그저 '왜 이러지?' 정도의 생각만 갖고 억지로 잠에 들려고만 했었다. 15일간의 유럽 여행을 다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의 아침. 최악의 악몽을 꾸었다. 나 자신이 비행기가 무섭다며 공포에 휩싸여 소리 지르는 꿈. 깨어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겪었던 일들은 비행기 공포증으로 인한 공황 장애구나.. 큰일 났다..'
오후에 탈 비행기가 무서워서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공포만이 가득했고 비행기를 탈 순간이 입대하는 그날보다 더 무서웠다. 억지로 잠을 자야지라는 생각에 약국에 가서 멜라토닌을 구매해서 한 알 먹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10번도 넘게 타 본 비행기 건만 너무 무서워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너무나 무서워하는 내게 기장이 무슨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수면제를 요청했고 그런 약물은 기내에서 취급할 수 없다는 답을 받은 것만 기억이 날 뿐이다. 극심한 공포에 그 어떠한 음식도 먹지 않고 잠에서 깰 때마다 멜라토닌만 먹었다. 수면제를 많이 먹으면 죽는다는 얘기가 있다. '멜라토닌도 수면에 관계된 약이니 이것도 많이 먹으면 죽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압도적인 공포 앞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게 큰 영향을 주지 못 했다. 자고, 깨고, 멜라토닌을 먹고, 다시 자고, 다시 깨고, 다시 멜라토닌을 먹고 이 상황을 반복하다 보니 다행히 죽지 않고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중에 세어보니 약 12시간의 비행기 동안 멜라토닌 5알을 먹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는 정말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술을 마시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카페인을 섭취할 경우 비행기 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안에 있는 것과 비슷할 정도의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우울증이나 공포증 같은 것은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나 걸리는 거라며 오만했던 나는 온몸을 벌벌 떨며 정신과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약으로 시간은 벌 수 있었으나 내 공포의 원인을 없애주지는 못 하였다. 그렇게 나는 약이 벌어준 시간으로 공포증과 공포증으로 인해 생긴 우울증을 없앨 실질적 방법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었다.
벌써 비행기에서 공포증이 생긴 이후로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거의 다 해봤고 한 모금도 못 마셨던 술과 커피는 이제 다시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것은 공포증과 우울증에 걸린 후에야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자신이 그동안 너무 막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저 두 개의 '증'이 없었다면 지금 알코올 중독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여전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숨만 쉬며 살아갔을 수도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증이 너무나도 무서웠기에 어떻게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 발버둥들은 내게 안 좋은 습관들을 없애주고 좋은 습관들을 만들어 주었다.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고 하던가? 내가 장담하는데 사람은 고쳐질 수 있다. 실제로 나란 사람은 공포로 한 번, 성실함으로 한 번, 우울증으로 또 한 번 해서 총 세 번이나 고쳐졌으니 말이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처럼 공포증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극복해왔던 고난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내가 앞으로 펼칠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척이나 행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