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를 했다. 무난히 ‘요즘 글을 많이 쓰고 있으니 글을 많이 쓰는 직업을 가져볼까?’ 정도의 간단한 마음이었다. 회사 첫날 신입들을 한 곳에 모았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그날 입사 한 사람은 나를 포함한 총 5명이었다. 다 큰 성인 5명이 어색한 기류를 흘리며 혼란스러운 눈빛 교환을 했다. 아마 그중 몇 명은 나를 보며 ‘뭐지 이 어벙하게 생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그래도 사람들은 착했던지 어벙해 보인다는 얘기보다는 어려 보인다는 얘기로 대체해주었다). 회사 첫날은 간단한 업무만 배우고 대충 시간 때우다 가는 날인지 알았건만 이번 회사는 제법 본격적이었다. 입사하면서 아이스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는 회사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기 어딘가에는 우리의 남자 친구 / 여자 친구가 있다’ 정도의 괴담 정도로만 알고 있던 정보였다. 오늘이 닿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이스 브레이크 타임도 내 여자 친구도 어딘가에는 존재했던 것이다.
1교시는 회사 예절 교육이었다. 회사에서 당연히 알아야 하는 컵을 쓰고 씻읍시다, 반쯤 마신 커피를 야근하는 팀장님한테 주지 맙시다 등의 어떻게 보면 뻔하디 뻔한 예절 교육을 배우고 나서 서로를 알아가는 아이스 브레이크 타임을 가졌다.
우리가 가졌던 아이스 브레이크 타임의 기본 규칙은 이렇다.
두 가지의 사실과 한 가지의 거짓을 준비한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1번에서 준비한 얘기들을 한다
남의 차례가 되면 세 가지의 얘기 중에서 거짓을 골라낸다
나는 1. 책을 출간한 작가이다(거짓). 2. 나는 신나는 외국 생활을 했다. 3. 나는 비행기나 배를 타지 못한다. 이렇게 3개의 얘기를 했었다. 2번과 3번이 누가 봐도 상반되는 내용이기에 사람들을 모두 속일 수 있을지 알았건만 무려 한 달 전에 내가 면접에서 했던 얘기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셨었다. 그때의 난 발간된 책이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고 이 분은 그 맹점을 파고드셨던 것이다. 아부 좀 섞어서 그냥 미남 미녀와 같이 면접을 봤었다 정도로만 기억하는 나와는 정말 차원이 다른 기억력의 소유자셨다. ‘세상에는 이런 기억력을 가지고 계신 분도 있구나, 다 나와 같은 기억력을 가진 것은 아니구나’ 등의 감탄을 끝으로 아이스 브레이크 타임을 마쳤다. 그때가 입사 후 1시간 40분 정도?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입사 후 2시간 57분. 오전 11시 57분이 되었을 때 나는 믿었던 동기들로부터 첫 배신을 당하게 된다.
우리가 도원결의를 한 사이는 아니지만 2시간이 넘는 동안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결의 아닌 결의를 했다고 믿었건만 그들은 유비, 관우, 장비가 아닌 선량한 시민 사이에 숨어 사는 마피아들이었다. 서로 자기소개를 얼마나 할 것인가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아무래도 한 두줄 정도의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지 않을까요?’라는 의견이 대세적이었고 철저하게 대세를 따르는 나는 정말로 두 줄 정도의 자기소개를 준비했었다. 나름 참신한 아이디어가 필요했으므로 예전에 ‘스터디언’ 유튜브에 투고했었던 내용의 제목을 따오기로 했다. ‘봉황이 되고 싶은 뱁새 ooo입니다’. 마치 로또 한 장 사고 ‘아~ 이거 당첨되면 뭐부터 사지?’하는 사람처럼 ‘아~ 이거 내가 너무 압도적인 문장을 내뱉은 거면 어떡하지’ 같은 헛생각을 하며 발표 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대망의 첫 번째 사람의 발표 시간이 다가오고 첫 발표자는 앞으로 나가 간단할지 알았던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건 누가 들어도 한 두줄 정도의 자기소개가 아니었다. 얼핏 들어도 여섯 문장은 나오겠다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모두가 그런 건 아닐 거라며 애써 침착을 유지했으나 두 번째 사람의 자기소개를 들었을 때 그들에 대한 내 믿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끝없이 어두운 깊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두 줄의 자기소개를 끝냈을 때 그들에 비해 나의 자기소개는 너무나도 압축되어 있었다는 차가운 현실을 애써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최소 4줄, 내 2배 이상의 자기소개를 하며 모든 자기소개 시간은 끝이 났다. 입사 첫날부터 배신감에 눈물이 흐를 뻔했으나 차마 그런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가질 수는 없었기에 또르르 흐르려는 한 방울의 눈물을 참기 위해 애써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입사 첫날에 받을 타이틀은 ‘첫 배신을 당했다’ 이거 하나면 족했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비교적 무난하게 끝났다. 부장님이 사주시는 밥을 먹고 팀장님이 사주신 음료를 마시며 우리를 간단히 테스트하기 위한 글을 2편 쓰는 것이 다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 독자분들이 보고 계시는 ‘처음’을 주제로 한 이 글이다. ‘처음’에 관한 글을 쓰라는 주제를 보고 나서 두 가지를 기뻐했었는데 하나는 다른 분들은 모르는 그들의 치가 떨리는 악행을 마치 어린 시절 아이가 선생님께 이르듯이 합법적으로 고자질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항상 글 쓸 거리가 부족해 주제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는 내게 제법 쓸만한 좋은 주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2022년, 이 차가운 대한민국에서도 아직도 세상은 아름답다며 나의 동기들은 다르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한 가지 당부 아닌 당부를 하자면 동기들의 따뜻해 보이는 표정과 남을 배려하는 듯한 언행에 속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에게 오늘 배운 쓰디쓴 교훈을 하나 공유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절대로 동기들의 '한 ~ 두 문장의 자기소개를 할 것이다'라는
달콤한 거짓말에 속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