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잡. 내가 그동안 항상 언젠가는 꼭 하겠다며 벼르고 있는 단어이다. 실제로 N잡에 대한 준비로 브런치에 글을 올리거나 포토샵 등을 공부하기도 했었다. 최소한의 시간만 투자했지만 이정도면 나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은 다른 열심히 사는 분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내가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 내 노력은 우물 속 개구리의 생각인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 동안 N잡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N잡의 N은 2인줄 알았었다. 내 생각 속에서 투잡 이상은 존재하지 못 했던 것이다. 근데 그 분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3개 이상의 N잡을 뛰고 계셨다. 내가 들은 것만 3개니 최소 3개란 얘기였다.
나는 그 동안 하루 총 한 시간 정도의 자기 계발을 하면서 나 자신이 잘 하고 있다고 믿었었는데 그 분의 앞에서는 태양 앞에 반딧불이에 지나지 않았었다. 열심히 사는 삶이란 그런 것이었던 것이다. 이전의 나는 분명 최선을 다 한 것이 맞았다. 다만 더 노력하는 삶을 살고 계시는 분을 보며 최선의 기준이 올라갔을 뿐이다. 사실 우리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정말 쉽게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인터넷을 켜서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는 문장을 치면 그들의 사연, 방법, 결과물 등이 쭈루룩 올라온다. 그럼에도 그들을 보며 큰 자극을 받지 못 했던 것은 자신도 모르게 '저들과 나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무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들과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 아예 다른 종이라고 착각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내 주변의 사람이 더 나은 자신을 생각하며 달려나가고 있는 것을 보자 수 많은 위인들의 명언들보다 그 사람의 발하는 빛이 훨씬더 크게 와닿았었다.
좀 더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한 문장이 궁금해 질 것 같다. '나도 그런 느낌을 받고 싶은데 그런 사람들은 어디서 만나지?' 내가 해본적은 없지만 한 가지 추측을 해보자면 독서실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우물 밖 개구리를 만났을 때 내가 우물 안 개구리인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우물 안에서 보이는 하늘의 매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우물에서 뛰쳐나온 한 마리의 개구리였던 것이다. 운 좋게 우물 밖 개구리가 이리로 오지 않는 이상 우물 밖 개구리를 만나려면 나 먼저 자신이라는 좁디 좁은 우물에서 다른 장소로 자신의 위치를 바꿔야 됨을 깨달았다. 그 장소를 나는 독서실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아침 일찍 가면 새벽부터 나와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사람을 콕 찝고 자신은 조용히 공부하거나 딴 짓하면서 단지 그 사람이 몇시에 집에 가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나는 운이 좋게도 회사에서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만났을 때 비로서 탈출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이 내성적이고 외향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라는 우물에서 뛰쳐나가고 싶다면 우물 밖에 있는 개구리를 직접 찾아 나설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