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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선 May 04. 2023

'거저 주는 것' vs '사고 파는 것'

데일리 임팩트 <세상 다시보기 칼럼> (2022.1.7)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원하는 것보다 늘 재화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제학은 희소한 재화를 어떻게 배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가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가 바로 “거저 주는 것과 사고파는 것 중 어느 것이 좋으냐?”이다.


사람들은 거저 주는 것은 착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저 주는 것으로 가장 존경받은 한 분은 마리아 테레사 수녀이다. 그녀가 미국 의회 양원합동회의에서 연설할 때 많은 의원들이 무릎을 꿇고 그 손에 입맞춤을 했다. ‘세계의 황제’라 할 미국 대통령들도 이런 존경을 받은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놀라운 일이다. 이는 거저 주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도 착한 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증거이다.


반면 사람들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은 착한 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고파는 시장은 툭하면 폐쇄되거나, 다른 것으로 그 기능을 대체하려는 세력들이 자주 나타났다. 또한 시장의 거래자들과 거래 촉진자들은 ‘장사꾼’으로 천시되어 왔다. 대개 이들은 사회계층 가장 아래에 속했고, 발언권도 약했다.


아직도 ‘장사꾼’이라는 말은 시장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일해온 기업 종사자들을 폄하하는 용어로 입에 오르내린다. 사실 해방 이후 재벌을 포함하는 이 ‘장사꾼’들이 세계적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그 과실을 공유하며 살고 있는데도, 소위 식자층과 권력층에는 아직도 이렇게 보는 자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현실을 보는 게 아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아주 단순한 영희와 철수 두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를 생각해 보자. 두 사람은 다 일할 수 있다. 먼저 철수가 물고기 다섯 마리를 잡아왔다. 이를 배분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영희가 원하는 두 마리를 ‘거저 주는’ 것이다. 철수가 거저 준 것은 착한 일이다. 그러나 영희는 일하지 않고 철수가 준 것을 거저 받았으므로, 이 사회가 가진 전체 재화는 다섯 마리 물고기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철수가 물고기를 영희에게 ‘파는’ 것이다. 이 경우 영희는 자신이 원하는 물고기를 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영희는 사과를 열 개 땄고, 물고기 두 마리를 사과 여섯 개를 주고 샀다고 하자. 이 경우 이 사회에는 물고기 다섯 마리에 더해서 사과 열 개가 생긴다.


그런데 이 경우 세상은 철수가 대가를 받고 팔았으니 ‘장사꾼이 제 잇속을 챙긴 것’으로 본다. 이를 착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물고기 두 마리를 사과 여섯 개를 받고 판 것이 부당한 이익을 챙긴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한다. 그러나 이 사회에는 철수가 값을 받고 팔아서 열 개의 사과가 더 생긴 것이다.


거저 주는 것은 착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이 윤택해지려면 거저 주는 것보다 사고파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마땅히 상인들과 기업인들을 우대하고 시장 활성화에 먼저 최선을 다해야 한다.


더구나 자선은 특별히 마음먹어야 베풀 수 있으므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자기 이익에 반해서 부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인센티브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거나 공평하게 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하는 것이다.


그러나 값을 받고 사고파는 일은 스스로의 이익에 부합하므로 이익만 된다면 누구든 그렇게 할 인센티브가 있다. 그러므로 애덤 스미스 이래 경제학은 시장에서 가격을 통한 자원 배분이 인류의 그 어떤 방식보다 가장 효율적임을 설파해 왔다. 시장이 이렇게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그 사회의 모든 재화가 가격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기준으로 가장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최적 배분되게 해서, 거래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경제적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경제학의 설파는 수백 년이 넘었는데 오늘날 경제학 전공자들조차 시장과 가격의 그 놀라운 가치창출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유학까지 해서 경제학을 배웠다는 박사와 교수들 가운데도 여전히 시장과 거래를 폄하하고 거저 주는 것(복지)을 사회운용 원리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닐까?


개인 간의 아름다운 미덕은 이따금 총체적으로 모아보면 미덕이 아니라 서로를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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