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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테겐녀?...테토녀와 에겐녀
그 사이

어빙 고프먼의 이야기를 빌려

by 이지수

종강 D-15. 기말고사 기간이다. 시험 기간엔 공부 빼고 다 재밌다. 안 그래도 책 읽느라 머리가 지끈지끈해서 오늘 글은 좀 라이트하게 써보려고 한다.


2025년 목표는 '트민녀' 되기.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이 되는 걸 올해 목표로 삼았다. 요즘 테토/에겐 분류법이 유행이길래 나도 한번 시류에 몸을 맡겨 봤다.


처음에는 테토/에겐이라길래 남성 여성을 이렇게 구분해 말하는 건가 했. 알고 보니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 성향이 짙으면 테토남/테토녀가 되고,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향이 짙으면 에겐남/에겐녀로 정해지는 듯했다. 쉽게 말하면, 남성적인 성향의 남자면 테토남이고 다소 여성스러운 남성이면 에겐남이라는 분류법이다. 여성도 이와 동일하다.


테스트하기 전에 난 어디에 속할까 고민하다 답을 내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성향이 다 있는 것 같았다. 평소 취향이나 남들에게 비치는 모습은 아마도 여성스러운 '에겐녀'에 가까운 듯한데, 내가 볼 때 나는 그렇게 여리여리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아서 또 '테토녀' 같기도 하고 그렇다.


types 앱에서 검사

결과는 예상한 그대로다. 테토 지수 51.5. 그러니까 테토와 에겐 반반이다.

스타일과 대인관계에서는 에겐 성향이, 연애와 문제 해결에서는 테토 성향이 높게 나왔다.


얼추 맞는 것 같았다. 반적인 향은 좀 여성스러운 편이고, 낯가림이 심해 대인관계에서는 살짝 수동적인 성향이 있다.

연애 관계에서는 마초 성향의 사람은 선호하지 않는다. "오빠가 다 해줄게" 타입은 질색이다.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그러나 싶어 그렇다. 문제 해결도 직접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가끔 불도저처럼 일을 추진할 때가 있다.


테스트를 마친 후 테토/에겐 남녀로 묘사되는 영상들을 좀 찾아봤다. 유튜브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테토 또는 에겐으로 정의하며 하나의 밈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했다.


영상 아래에 달린 댓글 역시 확인했다. 유튜브 댓글이 사회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재미로 볼 수는 있지만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사람을 나눌 수 없다'는 의견 공감했다. MBTI가 한때,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을 16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누며 붐을 일으켰던 것처럼 테토/에겐 테스트 역시 그런 구분법 중 하나로 보인다. 몰톡 하기엔 이만한 소재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현실 속 인간은 전래동화의 인물들처럼 전형적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절대적 선도 악도, 절대적 남성성도 여성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의 저자 어빙 고프먼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자아는 늘 양면성을 기 마련이다.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연극을 하며 살아간다. 무대 앞 자아(공적 자아)는 사회적인 자아, 달리 말해 '연기하는 자아'인 반면, 무대 뒤 자아(사적 자아)는 아주 내밀하면서도 날 것 그대로의 내 모습을 지닌 자아다. 렇다고 해서 무대 앞 자아가 '거짓'인 것은 아니다. 단지 기자처럼 우리는 황에 맞게 나의 모습을 바꾸며 살아간다.


아마 내가 테토/에겐의 비율이 비슷하게 나온 것도 그 때문일 것 같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외적 자아는 에겐녀에 가깝지만, 친밀한 사람과 있거나 홀로 있을 때는 테토녀에 가깝다. 나 역시도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고프먼은 더 나아가 자아는 스티그마(낙인)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자아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에게 부여된 일정한 사회 양식을 내면화하며 정립된다.아를 형성해 간다는 건 인의 낙인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이 현상은 특히 젠더 문제나 소수자에서 쉽게 드러난다. 그 예로 여성(또는 남성)은 사회로부터 여성성(또는 남성성)을 부여받고 내면화하며, 소수자들은 '정상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기대 양식을 충족시킬 때 비로소 구성원으로 충족된다. 달리 말해 나의 정체성, 자아는 온전한 내 모습이 아니라 '조건부로 회에 수용'*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127쪽 참조


그렇지만 낙인된 자들은 결코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인정 투쟁'을 벌인다. 학 용어로 말하자면 자아는 수행(performance)을 통해 형성된다. 자신에게 씌워진 낙인에 도전하고, 이를 전복시킨다.


대표적인 예시가 드랙(Drag)이다. 드랙 아티스트는 고정된 성정체성을 뒤집는다. 드랙퀸과 드랙킹 모두 드랙을 통해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항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드랙들이 성역할을 고정관념으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라는 반문이다. 드랙퀸을 예로 들자면, 이들이 표현하는 긴 머리에 미니스커트 그리고 짙은 화장은 여성성을 외려 부각하는 게 아닌가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물론 이 반론이 타당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일견 일리가 있다. 그러나 드랙은 이를 오히려 과장함으로써 사회에 부여된 여성성과 남성성을 과감히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성별이분법의 이성애 규범과 고정된 성 역할을 시각적으로 폭로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갖고 살아가는 나로서는 테토/에겐의 구분법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사회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이 어느 정도 있음을 인지하고 또 이해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괜히 남성스럽지 않은 남성(에겐남) 또는 여성스럽지 않은 여성(테토녀) 그리고 그 경계에 놓인 성소수자들이 이분법적 구분에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세계 속 사람들은 테토/에겐으로 딱 잘라 구분되지 않았다. 늘 믿는 것 중 하나가 있는데, 사람의 정체성 그리고 자아는 고정되지 않는다는 거다. 누군가는 나와 달리 여전히 남성성과 여성성이 건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의견 역시 일리가 있다. 성은 임신과 출산, 양육 등의 역할을 담당하며 사회를 유지해왔고 남성은 비교적 경제적 영역에서 활동해왔다는 점에서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으며 기나긴 스펙트럼 속에서 살아간다고 본다. 사람마다 각각의 특성에 대한 비율이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100% 또는 0%의 극단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언젠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생각해 보면 80억 명의 사람은 저마다의 삶과 가치관을 지니며 살아간다. 리는 모두 다르다. 겉모습도 생각도 전부 각양각색이다. 종, 성별, 나이, 종교, 장애, 성적지향, 혼인 여부 등 한 개인은 단일한 축으로 구성되지도,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한국은 여전히 다양성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정체되어 있고, 소수자의 저항 시위에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일 때도 있다. 특히 이번 대선서 거대 양당의 두 후보자들은 인권 문제에 다소 머뭇거리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주요 공약은 대부분 외교, 경제, 안보 등에 치중되어 있었다. 젠더 이슈를 의식해서 그런 걸까.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인권 등의 아젠다는 상대적으로 가려졌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국 인권 문제를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회 속에서 함께 살아감, 그리고 상대를 인정함의 의미로서의 '성원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인권이란 비단 소수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다.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야말로 한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지 않을까.


[참고자료]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어빙 고프먼, 『자아 연출의 사회학』, 진수미 옮김, 현암사, 2016.

어빙 고프먼, 『상호작용 의례』, 진수미 옮김, 아카넷,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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