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necdote

쪽빛과 바다

고운(孤雲) 최치원과 해운대

by 이지수

생각해보면 나는, 파란색에 늘 이끌렸다. 즐겨 입는 옷부터 수집하는 앨범까지 애정이 가는 물건에는 어김없이 파란빛이 감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면 망설이지 않고 파란색이라고 답했다. 그 이유는 아마 ‘바다’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평생을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바다를 벗 삼아 살아왔다. 바다의 푸름과 넉넉함이 이유 없이 좋았다. 고민이 있을 때면 바다를 보러 갔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차는 듯했다. 내게 ‘바다 보러 가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요즘 들어 생각이 많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아끼는 바다는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작은 해변이다. 꽤 오랫동안 나의 아지트가 되어준 곳인데, 괜히 기분이 울적할 때면 휴대전화와 헤드폰을 손에 쥐곤 집을 나선다. 홀로 청승맞게 슬픈 노래를 들으며 길을 걷다 또 멈추다 하며 바닷가를 거닌다.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와 저 멀리서 비쳐오는 등대 불빛의 고요한 적막이 참으로도 마음에 든다. 낮에는 푸른 물결이 반짝거리고 밤에는 짙은 군청색의 밤바다가 반겨준다. 그렇게 바다 주위를 맴돌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한결 마음이 평온해진다.


우리 동네 말고도 부산에서는 버스나 지하철 한번이면 일상 속에서 바다를 만끽할 수 있다. 부산의 바다가 유달리 매력적인 이유는 그 빛깔과 꼴이 모두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대표 격인 해운대와 광안리는 젊음의 열기가 느껴지는 곳이면서도 야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해변가다. 기장의 바다는 어찌나 드넓고 푸르른지 마치 동해의 쪽빛 같다. 다대포 해변은 짙게 깔리는 일몰이 그 명성답게 무척이나 수려하다. 그날그날 밀려오는 감정에 맞춰 마음이 이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한다.


부산의 바다는 많은 문인들의 영감의 장소가 된 곳이기도 하다. 원곡 한우석은 남포와 용두산을 바라보며 한가로운 바닷가의 한 장면을 그려냈고, 포석 조명희는 <낙동강>에서 낙동강을 배경으로 일제강점 시기 식민지 조선의 저항상을 그려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유명한 건 단연 최치원과 해운대의 일화다. <추야우중(秋夜雨中)>으로 널리 알려진 고운 최치원은 통일신라 시대 6두품이라는 신분의 한계에 부딪혀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 학자 중 한 명이다. 외로운 구름(孤雲)이라는 자신의 호답게 평생을 유랑하며 살았던 학자이기도 하다.

해운대석각 및 유적지 ⓒ해운대구청 홈페이지

그의 또 다른 호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해운(海雲)’이었다. 최치원은 동백섬의 한 바위에 자신의 호 ‘해운’을 새겼고 그게 현재까지도 이어져 해운대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해운대 동백섬에 가면 최치원유적공원에 조성된 그의 동상과 한시비(漢詩碑), 그리고 호가 새겨진 ‘해운대’ 석각을 볼 수 있다. 공원에 세워진 비석 중 하나에는 <우흥>이라는 한시가 새겨져 있는데, 이 시는 부산 바다를 소재로 삼은 최초의 문학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願言扃利門(원언경리문):
원컨대 말하노니 눈앞에 욕심을 부려서
不使損遺體(불사손유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손상시키지 말라.
爭奈探珠者(쟁내탐주자):
어찌하여 진주를 캐려고 다투며
輕生入海底(경생입해저):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바다 밑에 드는가.
身榮塵易染(신영진역염):
영화로운 육신은 티끌에 오염되기 쉽고
心垢水難洗(심구수난세):
편안한 마음의 때는 물로 씻기 어렵다네.
澹洦與誰論(담백여수론):
담백에 대하여 뉘와 같이 의논하리오
世路嗜甘醴(세로기감예):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단술만을 즐기니.

[우흥(寓興)_최치원]


최치원은 <우흥> 외에도 바다와 관련된 여러 한시를 남겼다. 김진의 연구에 따르면 무려 25수 정도 된다고 하니, 최치원과 바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감히 짐작건대 최치원은 바다를 바라보며 고독한 자신과 부패한 지배층의 모습에 한탄했을지도 모르겠다. 맑은 바다와 달리 세상은 이미 티끌에 오염되어 마음마저도 씻기지 않을 정도가 됐으니 말이다. 외로운 구름처럼 그의 삶은 알아주는 이 없이(知音) 쓸쓸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특히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고향을 그리워하던 최치원에게 ‘바다’란 등불 앞의 만 리 길처럼 느껴졌을 테다.


내게도 바다는 양면적인 장소처럼 느껴진다. 고요히 나의 내면을 품어주는 장소이면서도 인간의 심연처럼 결국은 닿지 않는 망망함이 있다. 마치 최치원이 바다를 보며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바다 역시도 내면의 소용돌이를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바다라 해도 드넓음을 껴안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바다는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묵묵히 견뎌낸다. 부딪히고 휩쓸리면서도 이내 다시 평정을 되찾는다. 바다의 수심이 깊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바다는 ‘파란색’ 한 단어만으는 담아낼 수 없다. 에메랄드 빛부터 감색, 군청색, 검은색까지 바다는 여러 빛깔을 고고히 품고 있다. 그 빛을 품는 데는 수없이 많은 파고를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나 역시도 아직까지는 파도를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해변가로 밀려온 파도가 거품을 내며 끝내 부서지는 것처럼, 나의 고난들도 결국은 무뎌지고 또 다듬어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나 역시도 쪽빛을 품은 바다 같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를. 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파고를 견뎌내는 것,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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