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이름들, 자(字)와 호(號)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주인공 치히로가 자신의 이름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치히로는 돼지로 변한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근로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쓴다. 그러나 악덕 사장인 유바바는 일하려면 이름을 바꿔야 한다며 치히로(千尋)의 이름을 빼앗고 센(千)이라 명한다.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기는 건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잊어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치히로를 도와주던 하쿠 역시 유바바에게 이름이 빼앗긴 신세였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름을 되찾고, 치히로는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속에서 치히로가 이름을 되찾는 일은 잊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그려진다. 치히로처럼 우리 역시도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려지기도, 또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기도 하며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는다.
생각해보면 태어나기 전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는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이름으로 불린다. 태명에는 태어날 아이를 향한 두 사람의 애정이, 그 이후에는 여러 사람과의 기억이 한 사람의 이름에 깃든다. 이름을 갖는다는 건 누군가와의 마주침이 생겼다는 의미기도 하다.
특히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에는 언제나 ‘이름’이 불린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우리는 자신을 소개하며 상대의 이름을 묻는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하고 말이다.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누군가가 나의 삶으로 들어오는 순간인 것이다. 마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호명은 고유명사 하나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친밀한 사이에서는 서로에게 별칭을 부르며 애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친구끼리 별명을 짓거나 연인 사이에서 애칭을 부르는 게 그 예다. 또 아끼는 물건이나 장소에도 나만의 이름을 붙인다. 어릴 적에는 애착 인형에, 나이가 들어서는 자신의 자동차나 집 그리고 자주 가는 산책길 등에 이름을 붙인다. 이처럼 호명 행위란 내가 타자를 인식하게 되는 시작점이면서도 우리의 기억을 붙잡아 두는 연결고리가 된다.
지금에서야 이름은 누구나 부를 수 있고 붙일 수 있지만 과거 선조들에게 호명은 그 자체로 숭고한 행위였다. 성인이 된 후 나의 이름(名)은 윗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부를 수도 불릴 수도 없었다. 이름 대신 자(字)와 호(號)로 불렸다.
자(字)는 성년식을 치른 남녀가 받는 이름이었다. 관례를 받은 남성과 계례를 받은 여성은 본명 대신 자로 불렸다. 자는 성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의미를 담아 본명의 뜻을 고려하여 지었다. 그 사람의 일생이 본인의 자처럼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윗사람이 지어준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호(號)는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별명에 가까웠다. 스스로 짓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지어주기도 했다. 이름이나 자보다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것이 호였다. 다산 정약용은 호가 많기로 유명했는데, 그 개수만 20개가 넘는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다산(茶山)부터 집의 이름이기도 했던 여유당(與猶堂)과 자신의 이상을 담은 사암(俟菴)까지 의미도 모두 남달랐다.
실은 나에게도 자(字)가 있다. 학부 때 한문학을 전공한 나는, 새내기 적에 학과 행사인 성년식에서 자를 받았다. 성년식은 전통적인 방식을 간소화한 절차로 치러졌다. 우리는 모두 한복을 입고 다도를 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했다. 선배들께선 남자 학우들에게는 갓을 씌워주셨고 여자 학우들에게는 비녀를 꽂아주셨다. 행사의 끝자락에 우리는 모두 하나씩 자를 받았는데, 나의 자는 선경(善卿)이었다. 착할 선에 벼슬 경으로 '세상과 어울리면서 반듯하게 살아가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하셨다.
과분한 이름이다. 착하지도 않고 벼슬을 지닐 만큼 바른 사람도 아니어서 그렇다. 아마 내 본명의 뜻인 가지를 닦는다(枝修)라는 의미를 고려해서 지어주신 듯하다. 언젠가 한 번 엄마께 내 이름 ‘지수’의 뜻을 여쭤본 적이 있다. 엄마께서는 나뭇가지를 닦는 것처럼 학문을 갈고닦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지으셨다고 했다. 사람이 이름 따라 산다는데, 이 까닭에 내가 미련하게 대학원까지 진학해서 공부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자를 받은 지도 7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학부도 졸업하고 어찌저찌 우여곡절을 겪으며 공부를 해나가고 있다. 독방에서 책만 읽다 보니 세상과 어울리지도, 반듯하게 살아가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나쁜 일을 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선비가 되는 건 어려울 테지만 풍류와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 되자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안빈낙도와 유유자적이 삶의 목표다.
내일모레면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뀐다. 아직까지 마땅히 이루어낸 건 하나 없다. 그렇지만 선경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세상과 어울리며 오늘 하루를 즐기자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이다.
추신
이번 여름 동안 과제로 매주 한 편씩의 글을 써야 한다. 글의 조건은 하나. '나의 이야기'를 담아 쓰는 것. 할 말이 많지 않은 나는, 겨우 글감을 쥐어 짜내고 있다. 괜히 하겠다고 한 건가 싶다. 공부하랴 글 쓰랴 하루하루가 바쁘다. 그래도 하는 수밖에. 일단 쓴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