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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SSTYPE Oct 17. 2018

제스타입작업일지 #33

지지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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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게 쉽지 않은 세상이다. 지금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이전 세대에는 이전 세대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고. 그 이전 세대에게는 또 다른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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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작업일지를 쓰고 있다. 지난 6개월 동안 나를 괴롭혀온 비가온다 리워드북 작업이 끝나가고 있다. 고백하자면 부끄럽다. 이 작은 책자 하나를 써내는 것이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 2년 간에 걸쳐 제작한 비가온다 서체를 완성하고 나는 내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했다. 실망했다는 표현이 어울릴까 아니면 내 결과물을 선보이기가 부끄러웠을까. 말하자면 그렇다. 나는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노력해서 완성한 비가온다 서체를 완성하고서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실망스런 결과물이라 생각했고 누군가에게 내가 이 서체를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웠다. 고작 이 정도의 결과물 밖에 만들어내지 못했나. 이러한 자기평가의 배경에는 나 스스로를 더 높게 평가하는 자만심 같은 것이 깔려있었다. 2년 전 기획하고 설계한 투박하고 엉성한 서체라 과거의 자신을 무시하고 지금은 이보다 훨씬 더 잘 그릴 수 있다는 그러한 자신감. 자만했다. 그래서 비가온다 서체를 소개하기 위한 리워드북에 손이 가지 않았다. 글은 쓰고 지우길 반복했고 갈수록 서체가 보기 싫었다. 꼴도 보기 싫은 그 마음을 아마 타입 디자이너라면 이해하지 않을까. 처음으로 시도했던 18개월의 장기 프로젝트였고 처음 시도하는 11,172자. 처음 시도한 5가지 웨이트.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당연히 어설펐다. 한 동안은 왜 이렇게 기획했을까 과거의 나 자신을 원망했을 정도였지만. 푸념해봐야 2년 전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자만하였고 과거의 나 자신에게 자괘감이 들었다. 주변에서 조언도 많이 들었고. 차라리 얼른 진행하고 손을 떼라는. 어쨋든 매듭은 짓고 넘어가야 하는데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괴로울 뿐이라는 이야기에 수긍하고 공감하면서도 손은 키보드를 앞에 두고 멍하니 멈춰있을 뿐이었다. 나는 지금 더 잘 할 수 있는데 과거의 기획이 현재의 결과물을 망쳐 버리고 내 수준을 깎아내린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생각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내가 자만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일이 쉬워졌다. 내 결과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면.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만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2년 전보다 조금 더 글자를 잘 그리고 아는 게 많아졌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 되었는가. 내 레벨을 스스로 인정하고 다시 위를 향하면 그만인 일인데 왜 그 동안 그렇게 괴로워했을까.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 마음을 먹는 게 참 쉽지 않다.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마음 같이 되지도 않는다.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 스스로 내려놓고 마음을 다잡았다.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인정하고 나니 마음은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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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이 많은 작업이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동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2년을 허비한 것은 아니다. 되돌아보니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이러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을까 싶다. 그저 하던대로 비슷한 프로젝트를 계속하지 않았을까. 글자에 대한 공부도. 활자에 대한 공부도.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채울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지난 2년은 나 스스로 얼마나 부족한지를 일깨워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서체에 대한 아쉬움을 작은 책자에 펼쳐본다. 담아낼 수 있는 것이 많진 않겠지만 프로젝트에 대해서. 그리고 작업 과정에 대해서도. 끝으로 서체에 대한 내용까지. 온 신경을 기울여 다듬는다. 편집은 잘 못하지만 아무튼. 최선을 다해본다. 그 오랜 시간 기다려준 많은 후원자 분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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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이랄까. 최근 이런 저런 일들이 참 많았다. 지난 작업일지를 4월에 기록했으니 지난 4개월 동안. tvN과의 작업 그리고 위즈덤하우스 디자인팀에 레터링 출강도 다녀왔고 해외 게임사와의 작업. 2018 FIT 뉴욕 전시작 준비도. 한글타이포그래피학교에서 레터링 수업도 여전히 하고 있고. 그러고 보니 검은 고딕에 대한 이야기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무튼 지금은 비가온다 리워드북 작업을 끝내야 하니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두고. 다음에는 구글폰트를 통해 배포하고 있는 검은고딕에 대한 이야기를. 그 다음에는 한글 레터링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또 그 다음에는 다음 제작할 서체에 대한 이야기를. 얼른 작업을 마무리하고 기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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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처럼 일이 진행되면 참 좋을텐데 세상 일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마음처럼, 쉽게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10월 중순에 다시 글을 이어가고 있다. 명절에 본가인 제주도에 내려가 어릴적 읽었던 글쓰기에 관한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말재주, 글재주에 자신이 없었다. 책을 읽어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단순한 문장, 쉬운 어휘, 수동태보다는 능동태를 사용할 것, 부사의 사용은 줄이고, 주제문을 앞에 두고 설명문을 뒤에 이어 문단을 정리할 것 등 언뜻 간단한 방법처럼 보여도 글을 쓰다보면 엉망이 되기 쉽다.


비가온다 리워드북은 결국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해당 서체로 본문을 구성하니 읽기가 너무 불편하다. 작업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담은 작업일지는 횡설수설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다. 다시 보니 레이아웃도 엉망이고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노력을 누가 알아줄까. 결국 거기서 거기 아닐까. 혹은 그 긴 시간을 고민한 만큼 그 값어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전자가 아닐까. 나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을 누군들 좋게 봐줄까 싶기도 하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버벌진트의 고 하드와 이센스의 에넥도트가 떠올랐다. 내가 기대하고 기다리던 앨범이었는데, 고하드는 실망스러웠지만 에넥도트는 기대를 충족시켜줬다. 물론 가장 좋았던 앨범은 기대하지 않았던 딥플로우의 양화였지만. 나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작업을 이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이 책을 받게 될 후원자 분들을 조금이라도 더 만족시키기 위해 작업을 이어 가는 것일까. 이 역시 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별 것도 아닌 이 리워드북이 손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툭툭 털어 놓아버리고 제작해서 배송하면 그 동안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 죄책감으로부터 해방감을 얻을 수 있을 텐데. 2년이 지나고, 아직도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폰트, 활자는 어떻게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일까. 어떤 모습을 기대하고 있을까. 일반적인 서체 견본집의 모습을 따를까. 조판, 편집하여 보여주는 것이 좋을까.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갈피를 못 잡았다. 결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련의 과정을 담아내려 했지만 작업일지를 그대로 이어붙이다 보니 글이 두서없고 횡설수설하여 읽다보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다시 정리한다.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긴 기다림에 따른 새로운 리워드를 생각한다. 이제는 매듭을 지어야 한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서도. 힘들지만, 또 다시 힘을 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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