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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SSTYPE May 31. 2020

제스타입 작업일지 #34

2019



다시, 오랜만에 기록을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나는 작업자로서 작업에 대한 태도를 중시한다. 주변에 워낙 대단한 디자이너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내 부족함을 인지하며 절로 고개를 숙여왔다. 사람보다는 작업을 바라보았고, 작업에 매진하지 않는 작업자는 진정성이 없는 작업자라고 생각했었다. 사람은 저마다의 가치관과 살아온 배경, 주어진 환경이 각기 다르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과 하기 싫어도 해야하는 일 사이에 엮여 이루고 싶은 이상과 현실 사이를 방황한다. 나 역시 그러한 과정을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왔고, 작업으로 작업자를 평가하기에는 이면에 내제된 가능성을 배제한 채 성급한 판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작업자를 가시적인 작업 외에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누구나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 그 가능성을 개화하려는 노력 혹은 어떠한 시도나 행위만큼은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드러나지 않은 배경과 환경은 결국 알 수 없기에 고려되지 않는다. 씁쓸하다.


올해 여러가지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지난 5년 간의 행적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서 독립한 2015년 이후 지금까지 내가 어떤 작업들을 해왔는지 살펴보았다. 때로는 부지런하게 때로는 나태하게 작업을 이어오며 꾸준히 글자를 그렸다. 어수룩한 초기작업들을 보면 그래도 성장에 대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아직도 미흡하고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지만, 부단히 노력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에 그 과정에는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았다. 현재 내 삶은 워라밸이라는 것이 없다. 작업이 일상을 밀어내고 머리 속에는 작업 밖에 없으며 적당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수면시간을 줄인 채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아러한 피폐한 삶이 안타깝다는 말을 전한 적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노예를 자처하지 말고 평온하게 살아가라는 이야기에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가 바라보는 나의 삶은 피폐하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돈을 쫓지도 않는다. 작고 소소한 목표를 이뤄가는 성취감으로 충만하고, 보다 빨리 더 많이 이루고자 하는 욕심은 돈이 아닌 작업을 쫓고 있다. 그 욕심과 성취감으로 나는 작업을 이어왔고 나아갈 것이다.






작년에 작성하던 글을 새로 열어 기록을 이어간다. 

한동안 그리는데 집중하다 보니 글을 쓰는 것은 조금 낯설다. 

작업만큼이나 기록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결과물도 좋지만, 좋은 과정이 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결과물에 나타나진 않지만 그 안에 담긴 과정까지 이야기하고 싶어서 기록을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또한 도움이 된다면 정말 기쁘겠지만, 이 기록은 대부분 나를 위한 것이다. 여유가 주어질 때마다 나 자신을 뒤돌아보기 위해서, 여유가 주어진 지금 다시 기록을 시작했다.



지난 2019년은 좋은 일이 가득했다.

가장 기쁜 일은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와 8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아직까지 일상에 큰 변화는 없지만 머지 않아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나눌 변화의 계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작업일지에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담기는 조금 그렇고,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작년에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가장 의미있는 프로젝트는 '마포구청 서체디자이너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다. 디렉터의 역할을 맡아 열명의 타입디자이너를 길러내는 사업으로 1월부터 10월까지 10개월 동안 진행했다. 대부분 사회초년생에 글자를 처음 그려보는 지원자들을 케어하는 것이 생각보다 버거웠지만, 처음부터 타겟팅했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한글꼴 공모전에 7명의 지원자가 수상하여 의미있었다. 나에게는 디렉터로서의 경험과 장기간의 교육을 경험한 것이 가장 큰 선물이었다.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프로젝트는 티빙 전용서체 프로젝트다. 9개월에 걸쳐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3종의 전용서체 제작까지 진행했다. 처음으로 진행한 전용서체 프로젝트라 좋은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심 후반 작업이 조금 아쉬워 마음에 걸리지만, 당시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가 남기 보다는 내 부족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확실히 긴 호흡의 작업은 힘들다. 물리적인 작업 시간이 길기도 하지만, 장시간에 걸쳐 점차 누적되는 부담감이 더 크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 반면 아스달연대기의 프로젝트는 로고타입과 전용서체 기획을 맡아 진행했는데, 한달 동안 파생을 위한 기본 모듈 200자 가량 그렸다. 딱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랄까, 너무 촉박하지도, 길게 늘어지지도 않아 깔끔했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타이포잔치다. 일상의실천 김어진 디자이너가 큐레이팅한 다면체 섹션에 참여했다. 타이포잔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어떤 디자이너들이 이런 전시에 참여하는 것일까. 나 같은 디자이너도 언젠가는 참여할 수 있을까.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던 대학생 때부터 동경하던 전시에 직접 참여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무척 의미있는 프로젝트였다. 타이포잔치에 참여하면서 전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타이포잔치는 글자 자체보다는 그래픽, 시각언어가 주를 이루는데, 글자조형과 글자표현, 타입디자인과 레터링이 돋보일 수 있는 전시 프로젝트가 있으면 좋겠다. 타입디자인은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히읗 전시를 진행하고 있으니, 레터링이 주가 되는 전시를 해마다 진행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 끝에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글자그리고표현이라는 한글레터링 수업을 하고 있으니, 수강생들의 결과물과 다양한 디자이너 작업을 선보일 수 있는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시작은 조촐하더라도 꾸준히 하다보면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이 밖에도 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진행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바쁘게 보낸 해가 없었다. 직장 생활을 하던 때에도 평균 10시면 퇴근했는데, 작년에는 9시부터 6시까지 마포구청 서체디자이너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퇴근 후에는 서체개발과 외주업무를 진행하며 특히 7월에는 한달 평균 수면 시간이 3시간이었다. 그만큼 힘들기도 했지만, 지나고나면 값진 경험이었고, 보상이 있었다. 그럼 작년 이야기는 이쯤해두고, 다음에는 지금 진행하고 있는 최정호 프로젝트에 대해서 기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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