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서체학연구 - 월인석보의 서체미
2018.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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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그리면서 월인석보라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월인석보는 세종29년(1447년)에 완성한 ‘석보상절’ 24권과 어제국한문 악장체의 세존칭송가인 ‘월인천강지곡’ 3권의 내용을 바로잡고 그 저본에 경첨하여 신편한 다음에 양 제목의 위 두 글자를 따서 월인석보라고 재제하여 세조5년(1459년)에 간행한 초간본이라 설명하고 있다. 논문모음집 답게 어렵게 설명해두었지만 쉽게 말하자면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쳐 월인석보라는 문헌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초등 중등 고등 교육을 마친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옛 문헌을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자를 그리고 있는 나조차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니. 새로운 것만 배우려하기 보다는 옛 것을 잘 아는 것도 참 중요한 것 같다.
월인석보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우선 형태적인 특징은 훈민정음해례본에 나타나는 곧은 획과 네모꼴의 자형을 벗어나기 시작한 문헌으로 그 자료적 가치가 분명하다. 왜 한글의 형태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일까.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내용을 잘 정리하여 보여준다. 읽기가 쉽지 않지만 뜸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를 보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한글문자의 조형에 대해서 그 자료적 가치는 분명한 것 같다. 이 책에 담긴 수많은 옛 문헌의 글자들을 한자 한자 집자했을텐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아쉬운 점은 더 많은 글자들이 담겨 있으면 좋았을텐데. 이 책은 사실 대부분이 텍스트로 이루어져있고 이미지는 별로 없다. 그 부분이 너무 아쉽다. 형태의 변화를 살펴보자면. 훈민정음해례본을 포함한 그 이전의 문헌과 비교하여 자모음의 기본 구조와 형태가 달라졌다. 점의 형태는 원형이 아닌 방향성을 가진 삐침이 생기고 점차 부드러워졌다. 획은 붓으로 부드럽게 쓴 듯한 느낌이 나도록 했다. 한글의 형태를 단순하게 획의 모임으로 해체하여 생각해본다면 부리나 맺음 등 붓이라는 도구로 인해 나타나는 획의 형태적 특징이 절제되어 나타난 듯한 느낌이다. 월인석보 자체가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한 문헌이라 월인석보 내에서도 한글문자의 형태가 균일하게 나타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담겨 있다. 이 책에는 그러한 한글문자의 형태를 원전과 각 부분을 비교하여 보여주는데 이러한 비교 분석도를 살펴보면 그 차이를 조금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획의 형태나 구조. 글자의 비율. 조합되는 자모음의 비례. 그에 따른 글자의 균형이나 안정감. 그리고 초중종성의 결구 분석도나 중심 및 균형 분석도를 보면 각각의 초중종성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낱자 상태의 결합구조와 조형규칙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붓의 특성상 획의 굵기는 균일하기 힘들지만 어느 정도는 균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각 부분에 따라 획의 형태와 굵기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획의 굵기나 획과 획 사이의 간격. 글자의 비례나 비율 등은 균일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부분은 현재 한글을 조형하는 방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환경은 크게 변하였는데 한글의 조형이나 미감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화선지에 붓으로 쓰던 한글이 디지털 환경에서 컴퓨터로 그려내는 환경에 그대로 어울리지는 않을텐데 그 변화의 폭을 생각해보면 한글은 창제된 이후로 크게 발전하지 않은 셈이다. 물론 문자라는 것은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변화한다. 사용을 위한 체계나 구조에 대한 부분은 가로쓰기와 문장부호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역시 도입된 지 100년이 되지 않았고. 한글의 조형과 미감을 굉장히 우수한 수준까지 끌어올린 디자이너는 손에 꼽을 수 있다. 갈 길이 얼마나 먼지 알 수도 없다.
아무튼.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당시에도 시각보정 개념이 있었다는 것이다. 월인석보에서는 ㅇ의 둥근 정도나 가로 세로 획의 굵기 차이. 동일문자의 크기 차이와 동일문자의 비정형성 표현 정도에서 시각보정에 대한 이해가 엿보인다. 연결문자의 결구나 배자에 따라 글자의 크기나 굵기 그리고 간격을 조절하여 시각적 균형을 다듬은 것이다. 한글의 조형 뿐만 아니라 옛 문헌의 타이포그라피. 편집 디자인에 대한 부분도 살펴볼 수 있다. 지금까지 늘 새로움만 쫓아 한글을 그리던 나에게는 이 옛 문헌이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다. 옛 것만 못한 새로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까지 옛 것은 그저 낡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반성이 되기도 하고. 또 공부가 되기도 한다. 알면 알수록 배울 것이 많아지고 있다. 지금 당장 이런 부족함을 모두 채울 수는 없으니 무엇이 부족한 지를 정리해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