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여정에 만난 사람, 그리고 음식(2)

그 남자 100 그리고 분짜

by 아또또리

그 남자 이름은 100이다.

그를 독일 유학시절에 처음 만났 나에게 분짜를 만들어 준 남자다.



남은 마지막 학기, 여러가지 미래에 대한 고민과 독일을 떠나기 싫은 마음이 뒤섞인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에 괴로워하던 시기였다.

겨울이 지나고 이제 슬슬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쌀쌀한 3월 어느 날, 별로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야외 바베큐 파티에 초대받고 갈까말까 고민하다가 고기라도 먹고 오자 생각하고 나간 자리였다.


아는 베트남 친구들이 대부분인 자리였고 우리는 조촐하게 고기를 굽고, 함께 사진도 찍고, 날씨 좋은 볕 아래 옹기종기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다른 친구들의 시선이 꽂힌 멀지않은 발치에서 두 남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고, 힐끗보고 새로 온 베트남 학생들인가 보다 하고 나는 접시에 담긴 고기를 한 점이라도 더 먹기 바빴다.

그 때까지 몰랐다. 그 때 걸어온 검은 옷, 검은 모자를 쓴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토록 립고 애틋한 사람이 될 지 정말 그 때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아마, 처음에는 내가 인식하는 베트남 남자와 좀 다른 그의 겉모습, 되려 중국인이나 한국인과 비슷해 보이는 마스크와 큰 키에 익숙함과 그로인한 편안함으로 시작한 것 같다.

무엇보다 그가 내가 한국인임을 한 번에 알아봐 주었을 때 내 눈빛은 반짝했다.


요즘은 한국이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해 세계 속에서 인지도가 높아져 한국에 관심있는 외국인들은 화장이나 옷차림 등으로 한국인을 중국, 일본인들과 구별해 내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주로 살았던 나라는 개발 도상국, 한국이 어디 붙어있는지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도 많고 길을 걷다보면 100미터 멀리에서 부터 "짜이나" 죽어라 소리치며 쫓아오는 전혀 반갑지 않은 아이들, 지나갈 때 칭챙총은 개도국이든 선진국이든 어디에서나 들리는 말이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나를 베트남, 태국인으로 보는 서양인들도 있었다. 언급된 모든 나라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냥 그런 순간들의 피로감이 쌓여 왔다.

그래서인지 나를 단번에 한국인으로 봐준 그가 고맙고 달리 보였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학기, 그리고 그의 첫 학기에 우리는 처음 만났다.



인연이 될 사람이었던가? 파티에서 첫 만남 이후 따로 만날 일도, 별다른 관심도 없어 잊고 지낸 그에게 두어달 후에 연락을 할 일이 생겼다.

석사 논문의 주제를 정하고, 미얀마에서 리서치를 한 후 한국에 돌아가 논문을 쓰고 졸업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였다.

문제는 새 학기 시작 후라 기숙사 계약기간이 남아있어 급히 다음에 들어올 학생을 내가 구하고 나가야 선불로 지급한 몇 달 치 기숙사비를 돌려 받을 수 있게 될 판이었다.

독일로 유학을 가기 전부터 나는 신청한 기숙사를 배정받아(후에 알고보니 기숙사 배정받기는 꽤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왔고, 근 2년 내내 이사할 일이 없어서 기숙사나 방을 구하는 루트에 관심이 없었다.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귀찮은 상황에 친구들에게 주변 사람들 소개를 부탁했다. 그러나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만은 없는 상황,

그 때 문득 100이 생각났다.


파티에서 그가 학교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곳에 산다는 말이 떠올랐고, 그간 연락은 서로 한 번도 안했어도 페북 친구를 맺어 두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없이 쪽지를 날렸다.

그는 틀린 한국어로 반가움을 표시했고, 얘기를 나누고 흔쾌히 내 방에 들어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 내 방을 한 번 보러왔고, 그가 오기 전 배가 고파서 만들어 두고 먹지 못한 부침개를 같이 먹었다.

그에게 방을 보여주고 나는 산책을 나갈 참이라 그냥 아무 생각없이 그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제안했는데 그도 수락했다.


이제 독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하얀 도화지였고, 왠지 그 곳을 내가 유학생활 동안 좋아했던 것들로 조금 채워주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도 계속된 산책 만남을 통해 내가 이미 가본 곳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종종 사먹던 젤라또 아이스 크림, 학교 내 시냇가 언저리 자리도 그의 도화지에 채워지길 바랬다.



하나의 만남은 그 다음의 만남을, 그리고 또 다른 형태의 만남들을 기약했고,

그런 시간 속에 나눈 대화를 통해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알게 되었는데,

특히 과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있고, 본인이 그 곳에 온 이유를 잘 알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달리 보였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별게 없었지만 만나는 동안 이야기는 끊임없었고, 편하고 즐거웠다.

그런 그가 어느새 내 마음속을 차지했고, 나의 마지막 학기는 그렇게 그와의 만남을 설레며 기다리고 그리워 하는 시간들로 채워졌다.


처음 그의 방에 초대받은 날, 내가 분짜가 먹고 싶다는 말을 기억하고는 그는 분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방안에 취사도구들을 두고 쪼그려 앉아 요리하던 그의 뒷모습은 사진으로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100이 만들어준 분짜


결과적으로 그는 내 기숙사 방을 차지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직접 물어본 적도 물어보기도 싫었지만 항상 궁금했었던 여자 친구의 존재 유무는, 다른 베트남 친구를 통해 "존재함"을 확인했고,

그럼에도 나는 그를 여전히, 너무, 많이 좋아한 채로 마침내 계획대로 독일을 떠났다.


떠나기 전 그와의 마지막 날, 그동안 함께 가본 곳 중에 가장 좋았던 곳에 앉아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야기는 내 방에 와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짐정리 하다 도저히 가져갈 수 없을 거 같은 나의 2년 간의 눈물겨운 학습 흔적이 담긴 하드파일을 그에게 맡기며 언젠가 내가 독일에 다시 돌아오면 돌려달라 했다.

그러나 이후 나는 독일로 돌아가지 않았고 3년간 간간히 이어졌던 그와의 연락도 끊겼다.


그러다가, 독일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올 해 나는 극적으로 그의 고향인 하노이에서 재회했고, 그는 독일에서 가져온 그 파일을 나에게 건넸다.

5년이라는 시간 안에는 그가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멀리 떨어진 동네로 이사를 가야했던 시간도 포함돼 있는 걸 나는 안다.

그 말인 즉슨, 이 무거운 걸 함께 들고 옮겨 다녀야 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더이상 의미가 없어진 것이기에 나는 그에게 왜 버리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이 파일을 처음 맡기며 했던 말을, 나조차도 이제 기억 나지 않은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그동안 노력하고 발전한 흔적이라고.



하노이에서 마지막 날 우리는 어느 식당에서 분짜를 함께 먹었다. 만약 앞으로 할 일이 없게 된다면 한국에서 같이 분짜 식당을 열자는 말을 그에게 슬쩍 건네며.

독일을 떠난 이후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고 우여곡절도 참 많았다. 세상을 돌고 돌다가 다시 그에게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잊고 싶었던 그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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