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봉사하고 일하고 공부해 온지 이제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더불어 파견직으로 주로 해외에서 근무해 온지도 7년째이다.
현재는 캄보디아에서 근무 중이나 앞서 4개 국가에서 일하고 살며 한국에서 살았으면 만날 일이 없었을 거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일들도 겪었다. 주로 개발도상국에서의 파견 업무이고, 수도가 아닌 시골지역, 주변 지역 등에서 살면서도 큰 안전상의 문제없이 잘 살아왔기에 나를 지켜주는 무언가에 감사하고 있다. 단 한 번의 사고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 또한 이제는 그냥 인생에서 하나의 에피소드로 얘기할 수 있는 일이 되었지만, 사고 당시와 그 이후의 과정에서 겪은 일들은 인생에서 딱 한 번이길 바랄 뿐이다.
동티모르에서 근무하던 약 5년 전에 나는 출퇴근용 자전거를 수도에서 사서 9시간이 걸리는 내 근거지로 가져왔다. 그 깡촌에는 뚝뚝이라는 교통수단이 있었지만 아침에 같은 방향으로 등교하는 학생들과 경쟁해야 하는 경우도 많고, 퇴근 시 인근에 지나가는 뚝뚝이가 없으며 그냥 걸어와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뭔가 나름의 교통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때마침 함께 근무했던 봉사단원들은 이미 자전거를 사 온 터라 나도 하나 장만해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닌 지 나흘도 안되어 퇴근길에 갑자기 뒷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 워낙 포장이 안 된 흙과 돌이 깔린 그저 그런 시골길이지만, 이렇게나 빨리 펑크가 난 게 이해가 안 되었다.
살펴보니 어처구니없게 대못, 압정도 아닌 스테이플러 심지 같은 것이 박혀있었다. '겨우 이 정도에 펑크라니....'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 퇴근시간이라 곧 어둑해질 것이었지만 새 자전거가 펑크 난 것도 억울하기도 하고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도 이걸 꼭 타야 한다는 고집? 같은 게 생겨 집으로 가는 방향을 돌려 시장 내 수리점에 들러 결국 수리를 해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상한 꿈을 꾸었다. 본래 꿈을 잘 꾸지 않는 나지만, 꿈을 꾸었던 당시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어느 곳에 인질로 잡혀있던 거 같은데 누군가 내 등에 총구를 대고 "너 이제 곧 죽어"라는 말이 상당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
'참 이상한 꿈이네.' 출근 준비를 하며 문득 떠오른 꿈을 곱씹다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준비를 마치고 어제 수리한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양 옆에는 유니크(unique)하다는 단어 밖에 떠오르지 않는 동티모르의 독특한 초원의 풍경이 펼쳐지는 시골길을 달리며 앞에 등교하는 한 무리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았다. 그들의 곁에 다다를 즈음, 찰나의 순간 5센티가량 옆을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간 오토바이가 내가 살짝 방향을 오른쪽으로 돌린 앞바퀴를 치고 지나갔다. 잠시 우왕좌왕 중심을 잃은 내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질 때에는 하나의 슬로 모션 장면처럼 기억되어 그럴까? 오른쪽 발이 가장 먼저 살짝 바닥에 닿은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치 너무 아파서 울음이 나왔다. 발을 부여잡고 앉아서 우는 나를 중심으로 주변 학생들이 모여들어 둥그렇게 에워싸고 구경만 할 뿐이고, 나를 치고 간 그 오토바이를 탄 고등학생은 100미터 앞에 멈춰 서서 뒤돌아 보다가 돌아와 둘러싼 고등학생들 뒤에서 멀뚱히 해맑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후 몇몇 여학생들이 나를 부축하여 뚝뚝을 잡고 인근 국립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국립병원이라지만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허우대만 멀쩡한 동네 병원은, 엑스레이 기계가 없어 아픈 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을 할 수 없었고, 검은 때가 낀 인조 가죽 시트로된 응급실 침대에 나를 한 참 내버려 두었다. 전화를 받고 달려온 봉사단원과 사고 경위를 이야기 하고있는 와중에 의사인지 분간이 어려운 사람이 갑자기 들어와 내 다친 다리를 보다 찰싹 손바닥으로 때리며 "안 아프지?"이런 말을 내뱉는 상황이 나는 너무 어리둥절했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건지.... 황당해서 아프다고 항변하듯 말하는 나의 말은 무시하고 이후 한 번 더 때리고는 겉으로 난 팔과 발의 상처만 소독하고 빨간 약을 바른 후 나갔다. 간호사는 불량식품 색깔이 나는 약만 3일 치 잔뜩 처방하여 나를 집으로 보냈다.일단 약을 먹고 3일 동안 지내다가 심하면 다시 오라면서...
결국 그 발 안에 뼈 3개가 부러졌음은,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며 3일을 완전히 방치한 후 찾아간 미국인 선교 의사의 도움으로 임시 부목을 덧대고 수도로 이동할 차량 임차문제로 주말 이틀을 더 기다린 후, 수도의 큰 병원을 찾아 엑스레이를 찍은 뒤 알 수 있었다. 사고 직후 그다음 날이라도 수도의 병원을 방문하거나 그 당시 재직 중이던 기관 본부에 알려 SOS 서비스를 받아야겠다는 생각보다, 발에 정말 큰일이 생겨서 큰돈 주고 차를 렌트해 수도까지 가야 하는 것도 까마득했고(물론 자부담은 아니었어도), 무엇보다 이제 파견 3개월이 지나는 시점이고 프로젝트가 막 중요한 활동들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 PM으로서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 뭐, 직업이나 일에 대한 큰 사명감이라기보다 그냥 다친 발로 인해 여차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판단미스이고, 나를 최우선으로 아껴주지 않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부어오르는 발은 아프면 더 아팠지 미국인 의사가 준 이부프로펜 한 통을 다 먹는 상황에도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더불어 그때까지 가해자 학생이나 그 가족으로부터 어떤 사과의 전화나 방문은커녕, 내가 출근하지 못한 사무실에 자꾸 찾아와 사고 후 경찰서로 인계된 본인의 오토바이를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다는 것을 봉사단원한테 들은 후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왜 혼자 3일간이나 아픈 발이 낫기를 기다리며 집안에서 이러고 있지? 뭘 위해서?
이후 수도로 이동한 후부터 한국에 급히 돌아오자마자 찾은 병원에서 결국 수술대 위에 올라야 했던 과정, 그리고 치료가 다 되지 않은 상황에 동티모르로 돌아가 1년 임기를 모두 마치기까지의 과정을 구구 절절 기록하지는 않겠다.
이미 애써 떠올리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 경험이지만 문득 한동안 타지 않던 자전거를 요즘 다시 타면서 사고 전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타이어펑크가 났을 때 그냥 집으로 돌아왔더라면.. 그래서 다음 날 그 자전거를 타지 않고 출근했더라면 그 사고를 겪지 않았을까? 나를 지켜주는 무언가의 도움 신호였을까? 그리고 사고 전 날 꾼 꿈은 예지몽이었을까?
동티모르로 돌아온 이후로도 나는 그 자전거를 다시 탔고 타이어는 단 한 번도 펑크 난 적이 없었다. 더불어 그 어떤 사고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