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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로 Zugang Sep 24. 2023

토요일 저녁, 낭만

저녁 11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다. 막걸리와 부침개를 드시며 기분 좋아진 부모님이 내게 물어보셨다. 

„오늘 어땠어?“ 
„잔디밭에 앉아 밤하늘을 보며 신나게 이야기했어. 낭만이 있던 순간이었어.“ 


스터디그룹을 만들었다. 첫 모임으로 토요일 저녁 피크닉을 제안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이제 막 한국에서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한 명은 몇 주 전 한국대학 학부를 졸업했고, 한 명은 독일에서 석사를 하던 중에 일을 시작했으며, 한 명은 한 달 전 미국에서 박사가 되어 한국에 온 미국인이다. 골똘히 고민하며 연구하고,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게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회사 생활에 잘 맞지 않은 성격과 습관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조직에 들어가 익숙하지 않은 일을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으며 고군분투하던 중이었다. 


대학원 생활과 회사 생활은 다르다. 사회과학대학원 생활은 혼자 결정해야 하는 게 많다. 혼자 연구 주제를 정하고, 수많은 참고 문헌을 보며 논문에 인용할 문헌을 스스로 정해야 하며, 하루 24시간을 스스로 계획해서 써야 한다. 느리고 성과 없어 보이는 삶이라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용기를 주어야 한다. 


회사 생활은 바쁘다. 내 일도 잘해야 하고, 팀원들과 함께 하는 일도 바로 처리해주어야 한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지금 당장 끝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고민할 시간이 없다.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 대학원 생활을 하다가 들어온 신입은 모든 면에서 서툴 수밖에 없다. 일하는 방식도, 생각하는 방식도, 표정도 다르다. „내가 이 일에 맞지 않나?“ 생각이 수 없이 든다. 


나 혼자 하던 고민을 친구들과 하니 속이 뻥 뚫린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치킨과 만두, 물, 고구마, 토마토를 먹으며 밤하늘에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았다. 왜 이런 낭만과 여유를 더 자주 즐기지 못했을까? 지금이라도 즐겨야지. 


우리의 대화이다.

1.

„내가 부족하게 느껴져. 내가 하는 것을 인정(recognition) 받았으면 좋겠어.“

„너 정말로 잘하고 있어 (You do very well). 옆에서 보면 너 정말로 잘하고 있어! 내가 인정할 수 있어.“


2.

„나는 내가 정말로 부족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 오랫동안 조직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는 내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일 테고, 나는 항상 그 피드백을 들으니까.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성장한 것을 보면, 전혀 모르던 분야를 이 정도하고 있는 걸 보면 나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맞아. 너 잘하고 있어. 내가 널 회사에서 처음 봤을 때 나는 네가 그 일을 몇 년 한 줄 알았다니까!“

„하하! 맞아. 네가 그랬지! 나 몇 년 일한 사람 같다고. 그때 나 3개월 차였는데.“


3.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길러진 성격과 습관이 지금 하는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지금 내가 일하는 곳에서 필요한 어떤 면은 부족하지만, 정말로 잘하는 게 있어. 지금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해야 하지만 말이야.“

„그럼! 네가 정말 잘하는 일이 있지. 그것을 항상 생각하는 게 중요해.“


일 이야기 외에도 외국인으로 사는 삶, 돈을 벌지 못했을 때 느꼈던 불안함, 말레이시아 역사와 인종, 영어와 한국어를 배운 이야기, 네 명이 잘하는 것(걷기, 한국어 문법, 정치학 지식, 사회과학 지식, 한국어와 영어, 엑센트가 없는 한국어와 영어 말하기, 모임을 만드는 일, 요리 등)을 이야기하며 공감했다. 


대화 도중 Deep Purple - Smoke On The Water 이 들렸다. 버스킹 락그룹이 하는 연주였다. „나 이 노래 좋아해!“ 친구는 Deep Purple 독일 공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선한 가을밤 잔디밭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낭만이 있는 토요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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