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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esting..

by 즈한

갑작스레 업무가 바뀌면서, 외국인을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회사로 찾아오는 외국인 미팅과 내가 직접 가는 해외 출장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문제는 내 영어실력이 매우 짧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주로 만나게 되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오는데, 이 들의 유럽식 영어 발음은 6차 교육과정을 간신히 수료한 내게 많은 시련을 안겨준다. 한 사건을 말해보자면, 프랑스에서 온 어느 CEO는 미팅 시간 동안 ‘따다’, ‘따다’라고 굉장히 많이 말했는데, 미팅이 끝나고 나서야 그가 말한 ‘따다’가 ‘Data’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Wifi를 ‘위피‘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걸까.

이 들의 발음에 내가 시련을 겪는 만큼 상대방도 나의 영어 실력에 꽤나 시련을 겪을 것이므로, 때아닌 동병상련을 겪기도 하는데, 한 번은 유럽에서 찾아온 또 다른 외국인을 만나 혼자 미팅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브라이언 크랜스턴)와 매우 흡사한 외모를 가진 그를 보곤 친숙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끼는 찰나,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하이, 나이스 투 밋츄’

그는 내게 제안 자료가 담긴 태블릿 PC를 건네며 자리에 앉았고, 그는 내 화면에 자료가 잘 보일 수 있도록 세팅을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열려야 할 앱이 자꾸만 열리다 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5번의 시도 끝에 다른 태블릿을 꺼내 시도했는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태블릿을 재시작해 보아도 같은 현상이 반복되자,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인떠르레스띵(Interesting)..’

나는 열리지 않는 그 앱을 바라보며, 어쩌면 그가 준비한 제안을 그의 입을 통해서만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를 것 같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나는 영어 듣기에 취약하다 못해 처참한 수준이므로, 내가 더듬어가며 읽을 수 있는 자료조차 없이 미팅을 진행한다는 것은 월터 화이트에게 큰 분노를 안겨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지도 모를 앱 개발자를 원망하며, 나는 자료 없이 진행해도 된다고 거짓말을 했으나 그의 모든 신경은 오직 그 앱을 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가득해 보였다. 역시 월터는 눈치가 빠르다. 그는 그렇게 5번을 더 시도하며 ‘인떠르레스띵..’을 외쳤는데, 결국 태블릿 PC의 전원이 꺼져버리면서 우리의 인떠르스뗄라와 같은 미팅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그와 마주 앉아 설명을 들었고, 10년 같은 1시간 30분이 지나 폭삭 늙어버린 우리는 서둘러 작별 인사를 했다. 부디 그 앱이 지금은 잘 작동하여 개발자가 무사하기를 기원한다.

외국인들은, 아니 적어도 내가 만난 유럽 사람들은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데, 그런 재치가 나는 좋다. 적절히 상황을 유연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그런 감각. 늘 여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유도 여유지만 적시에 발휘되는 재치 있는 유머에 다 같이 웃는 문화의 영향이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지난해 파리로 출장을 갔을 때, 호텔 엘리베이터에 피자박스를 들고 탄 청년이 생각난다. 만원이었던 엘리베이터 안은 순식간에 피자 냄새로 가득 찼는데, 한 노신사가 적막을 깨며 말했다. ‘흐음..스멜스 굿(Smell is good)’. 모두 웃었고, 나는 그 재치에 감탄했다. 이 얼마나 적절한 재치인가.


나는 아침마다 전화 영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종종 이러한 유머 연습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주말에 뭐 했냐는 질문에 집을 깨끗하게 정리했다는 설명 대신 ‘하우스키핑~!’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는데, 짧게 말하지 말고 길게 말하는 연습을 해야 영어가 늘 것이라며 따끔하게 혼났던 기억이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미국에 있는 Kimberly에게 감사를 전한다.(Thank you, Kimberly!)

킴벌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재치와 유머를 포기할 순 없었기에 어제는 우리 집 엘리베이터에서 프랑스에서 만난 노신사가 생각나, 옆에 선 배달 기사님에게 적막을 깨며 말했다. ‘흐음..냄새가 좋군요~?’


당연히 거짓말이다. 바쁜데 말 시켰다가는 또 혼날지도 모른다. 아무쪼록 내 영어실력이 늘어 언젠가는 나의 기막힌 유머로 외국인들의 배꼽을 모두 훔치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며, 그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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