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빨래는 언제나 막막하다. 특히 1인 가구에게 이불 빨래란, 과장을 조금 보태서 김장과도 같다. 튼실한 배추를 골라 고춧가루를 준비하고, 조기 몇 마리를 믹서기에 곱게 갈고, 갈아 둔 배와 함께 배춧속을 버무리는 바로 그 김장. 그렇다. 하기 싫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번에도 김장 대신 마트에 곱게 포장된 김치를 카트에 담듯, 곱게 포장된 새 이불을 새로 당연히 살 수는 없고, 곱게 접어 빨래방으로 향했다.
지난 주말이었다. 일명 코인 빨래방으로 불리는 그곳에는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적잖이 당황하기도 하는데, 이는 지폐도 잘 들고 다니지 않는 세상에, 코인으로 빨래를 하고자 하면, 500원짜리 동전이 최소 10개는 있어야 빨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코인 빨래방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지폐는 물론, 신용카드로도 결제가 가능하다며 나를 반기니 걱정 마시라. 아마 키오스크와 잘 얘기하면 외상도 허락해 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비트코인은 챙겨가지 마시길.
다시 빨래방으로 돌아와, 그곳에 도착했을 땐 나와 같이 김장을 포기한 듯 한 한 청년이 다량의 빨래를 들고 누군가와 대화중이었다. 이 공간을 청소하시는 분으로 짐작되는 분과 흥건하게 젖은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치워도 자꾸만 나타나는 집안 일과같이 바닥을 계속해서 흥건하게 만들고 있는 물의 원인을 찾고 있었다. 그때 그 청년은 조심스러우면서도 강단 있게, 세탁기에서 물이 새는 것 같다고 했다. 그것도 2번 세탁기라고. 이불을 넣으면서 나도 슬쩍 보니, 놀랍게도 정확히 2번에서 물이 한 방울씩 흐르고 있었다. 본인의 빨래도 제쳐두고 물이 새는 곳을 단 번에 짚어낸 그의 예리함과 결단력은 양념이 덜 무쳐진 배춧잎 하나를 발견하는 우리 엄마와 같다고 생각했다.
40분간의 빨래를 기다리며 밥을 먹고 돌아왔는데, 그는 다 된 빨래를 들고 건조기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3개의 건조기 중 완료된 건조기 하나를 빤히 보면서 말이다. 그것도 양손에 젖은 빨래더미를 한가득 들고. 물어보았다. “건조기 작동이 끝난 것 같은데, 꺼내고 사용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그가 말했다. “아, 종종 자신의 빨래에 손을 댔다고 싫어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괜찮아요.”그러면서 빨래의 주인이 곧 오지 않겠느냐며, 주말에 남는 게 시간이라는 너무 많은 정보까지 내게 알려주었다. ‘남는 게 시간이라도 집에 누워있고 싶을 텐데..’ 나머지 건조기는 내 빨래가 들어있어 족히 30분은 더 걸릴 텐데, 주인이 늦게 오면 어떡하나 괜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여기 근처에 사세요?” 그렇게 대화는 시작되었다.
5년째 이 동네에 살고 있다는 그는, 직장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급격히 나빠져 일을 그만두고 알바를 하며 지낸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상사와의 불화, 고객사의 갑질 등으로 마음에 상처를 꽤 받은 것 같았다. 출근길에 회사에 가까워질수록 속이 좋지 않았다던 그는 결국 기절하는 일까지 몇 차례 발생했고, 그의 나빠진 건강과 그나마 의지했던 선배들의 퇴사를 보며 그 역시도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최근 회사 생활에 대한 많은 고민과 회의를 겪었던 나로서 그가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감히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빨래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그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앞에 두고 처음 만난 사이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고,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 아니겠느냐는 말만 할 수 있었다.
뜨거운 바람을 맞아 포근하게 마른 이불을 정리하며 그에게 전할 작별 인사를 마음속으로 고르고 있었다. 어떠한 위로나 조언을 할 순 없었다.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내가 건넨 말은 만나서 반가웠으며, 좋은 주말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었고, 돌아온 그의 대답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한층 가벼워진 빨래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지도를 보며 이곳을 찾아왔을 때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어떤 것이든 익숙해지면 쉽고 빠르게 느껴진다. 작고 짧은 대화였지만 그의 깊은 상처들도 커다란 드럼 세탁기에 담겨 씻겼기를 바란다. 그리고 물이 새는 지점을 정확히 발견해 알려주는 섬세한 배려심을 가진 그라면, 그의 상처도 누구보다 잘 돌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봄을 앞둔 한 토요일 늦은 오후, 이름 모를 그의 안녕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