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주민등록등본,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를 가지고 과외 면접을 보던 날로 5개월이 지났을 무렵이다. 목동이 학구열이 높기로 유명한 동네인지도 몰랐고 아파트값이 그렇게나 비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 집에서 과외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골에서 올라와 자수성가한 아이의 아버지가 학벌보다 사람을 먼저 본 덕분이었다. 게다가 자신처럼 시골 출신에 자취하는 취업준비생이라는 점을 안쓰럽게 여겼다.
11살 아들은 나 말고도 과목별 선생님이 7명이나 더 있었다. 과학나라, 영어, 중국어, 한자, 어머니 기준에 따르면 필요하지 않은 과목이 없었다. 내가 나가면 거실에서 대기하던 다른 선생님이 바로 들어올 정도였다. 아이는 집중력이 떨어졌고 늘 피곤했으며 나보다 바빴다. 그리고 부동산 유리 벽에 붙어있는 아파트 매매가 중에서 자기네와 같은 매물의 가격을 똑 부러지게 기억했다. 20년 전이었던 당시 매매가가 11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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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동은 싸다고 했다. 같은 송파구지만 관악구 살만큼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서울대 입구 고시촌을 전전하다 신천에 사는 친구 말에 삼전동을 두 달이나 뒤졌다.
신천역에서 내려 전통시장을 마주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시장을 등지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길하나 사이에 두고 이래도 되나 싶게 다른 동네 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도떼기 같은 시장이 억척스럽게 정신을 빼먹는 동안, 반대편 아파트는 분양 카탈로그에서나 나올 법한 색감으로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누가 봐도 내가 집을 알아봐야 할 동네는 삼전동이 맞다고 말해주는 순간이다.
입구는 있는데 현관문이 어딘지 한참을 찾아야 하는 집을 둘러보았다. 녹이 슬어 삐그덕거리는 외부 철재 계단을 아슬아슬하게 올라가야 하는 단독주택을 다 돌았다. 그런데도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삼전동이라도 송파구라고 ‘구’ 값한다는 깨달음만 얻어 다시 관악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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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원에도 1층이냐, 계단 세 개짜리 반지하냐, 공기가 달라지는 게 보증금이다. 삼전동을 헤매다 억울한 마음에 맡겨놓은 돈을 찾듯 엄마에게 천만 원만 해달라고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오빠, 즉 삼촌의 아들이 전세금 천만 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빌려줬단다. 정작 돈을 빌려줘야 하는 자기 자식이 누군지도 모르는 말투에 부아가 났다. 잠실이라고 했다.
깡패를 동원해 철거 용역사업을 하며 17억짜리 잠실아파트에 전세로 사는 친척, 그에게 빌려준 천만 원은 끝내 받지 못했다. 17억이면 우리 집 전 재산보다도 많은 돈이다. 시골 사는 엄마는 잠실 아파트 가격이 얼만지도 몰랐고 전세금이라 하니 시골 집값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돈이 부족하면 형편에 맞게 살 것이지 깡패 부리며 사업을 한다는 핑계로 잠실 아파트에서 폼을 잡고 사는 게 마뜩잖았다. 내 돈을 내어준 것도 아닌데 그 돈 때문에 변변한 집을 못 구한 탓을 하며 아직도 그를 대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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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 집주인은 모텔 두 개를 운영하였고 원룸 한 채를 가지고 있었다. 원룸 복도에는 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간 가구가 켜켜이 쌓여있다. 새로 입주하는 학생에게 선심을 쓰듯 넣어주기도 하고, 모텔에 갖다 놓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가 나에게 장황하게 재산 자랑을 한 건 계약하던 날이었다. 두 딸과 사위, 며느리는 의사고 아들은 변호사라고 했다. 이미 20억이 넘는 잠실 아파트를 하나씩, 총 3채를 나눠주고 노후 취미생활로 건물을 관리하는 것이란다. 취미라고 하기엔 외부로 빠져있어 한기가 가득한 관리실도 방으로 꾸며 악착같이 월세를 받고 있었다.
재력가 부모를 둔 자녀의 행복이 부럽다고 말해줘야 했을까, 자식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아버지의 통 큰 배포를 대단하다 치켜세웠어야 했을까. 세 들어 사는 사람에게 참으로 공허한 자랑질이다.
6년을 살고 보증금을 돌려받던 날 5만 원을 제한 돈이 통장에 들어왔다. 계약 때부터 세면대 밑에서 트랩 구실을 하던 PVC 파이프, 즉 회색 플라스틱 파이프를 고정하던 철사가 삭아서 진즉에 떨어져 나갔다. 사용자의 부주의도 아닌데 수리비를 빼야 한단다. 파이프가 빠진 세면대를 쓰는 내내 허벅다리가 흥건히 젖는 불편을 감수한 게 누군지 모를 일이다. 오래된 철사가 삭아서 떨어졌노라 읍소를 했다. 그런데도 주인이 안 주면 못 받는 보증금이니 방법이 없었다.
자식들한테 20억짜리 잠실 아파트를 사줬다고 얘기하지 말던가, 의사 변호사 자식들이 있다고 자랑하지 말던가. 수백억이 있어도 이상한 셈법으로, 월세 사는 젊은이 등쳐먹는 꼴에 염증이 났다.
부자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구나.
<잠실동 사람들>이란 책 속에 다들 겪는 일인 양 익숙한 나의 이야기를 마주했다. 학구열, 돈, 의사, 변호사, 과외, 돈벌이, 저마다 사는 사정들.
잠실 고액 과외를 위해 빛도 들어오지 않는 송파구 삼전동 방에서 생활하는 과외 선생님 이야기에 현관에 벗어둔 단화가 눈에 들어왔다.
과외를 끝내고 현관을 나서려고 보면 벗어둔 신발 방향이 바뀌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학생 어머니나 일하시는 여사님이 신발을 돌려놓으며 브랜드를 확인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바로 놓인 신발이 배려보다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냥 먹고사느라 신고 다니는 신발입니다만, 눅진한 뒤축이, 해진 앞굽이 나의 습관을, 나의 형편을 들춰내듯 적나라했다.
지금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조금 더 나은 브랜드 신발을 신지만 뒤꿈치 굳은살이 또 다른 형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이 지난 기억인데도 <잠실동 사람들> 이야기에 공감이 되어 버리니 먹먹해진다. 변하지 않은 인생이라, 바뀌지 않은 현실이라,
무겁게 가라앉는다.
사진출처: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