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예쁘게 태어났으면 텐프로로 빠지기 좋은 사주야."
"연예인도 아니고 텐프로요?"
아니,
이왕 아주 예쁘게 태어났으면 연예인을 해야지 텐프로가 웬 말인가 했다가,
어쨌든 업계에서 상위로 분류되는 인생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가,
예쁘지 않다는 말을 제법 돌려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가,
기질과 성향을 설명하는 역술인의 재치라고 해야 하나, 기분 나쁘면서도 묘하게 수긍이 되어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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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할래? 내 친군데 잘생겼어."
내가 잘 따르는 과장님의 친구라니 어련히 좋은 사람일까, 일부러 가로수길에 들러 소개팅에 어울릴만한 옷도 사 입었더랬다.
"만났어? 어땠어?"
"친구분한테 여쭤보시는 게…. 8년을 만나고 헤어진 지 이제 한 달째라고."
"그 얘기를 했어? 미친놈. 기다려봐. “
"전 괜찮..."
술을 새벽 1시까지 마셨다.
날이 더워 가볍게 맥주를 마실 생각이었다. 물론 이자카야에서 시작한 것이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케가 취할 때까지 마시기 쉽지 않은 주종이지만 취하면 정말 대책 없는 술이기도 하다.
소개팅에서 나누는 대화라는 것이 그렇지 않던가.
취미가 무엇인지, 어디 가본 적 있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그는 전 여자 친구 얘기를 빼고는 그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싸웠던 기억, 헤어지던 날 상황을 이야기하며 자조적인 말을 쏟아냈다.
세 명이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소개팅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한다고 각성하듯 말하는 사람을 달래 가며 잔이 빌 때마다 그의 술을 채웠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실루엣이 드러나는 하늘하늘한 하얀색 반팔 티셔츠에 연한 카키색 H라인 치마를 입었다. 무릎 위 맨살이 제법 보일 정도로 짧은 치마는 아주 오랜만이다. 일자로 된 바 테이블에 모르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다리를 꼬고 술을 따르고 있다.
역술인의 말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텐프로,
그들의 직업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그냥 술자리에서 상대의 얘기를 들어주는 역할도 포함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택시까지 태워 보내드렸다.
그날 밤 택시가 그녀의 집 앞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정말 “자니?”를 안 할 수 없을 정도의 밤이었고,
“너의 집 앞이야.” 할 정도로 마셨으니까.
택시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다짐은 확실했다.
한 사람과 오래 연애한 사람은 만나지 않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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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최근 내가 그 정도를 만나고 헤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때 했던 다짐의 당사자가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나를 기피하겠구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소개팅 상대에게 당시 나는 어떤 말을 했을까.
아주 마음에 없는 위로는 안 하는 성격이니 대충 듣고 넘긴 말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AI 같은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 오랜 만남을 정리한 그에게 나는 무슨 말을 했을까.
불현듯 그때의 내가 보고 싶어진다.
오늘은 내게로 와 술잔을 채워보렴.
곁에 앉아 내 말을 좀 들어 보렴.
사진 출처: Unsplash의 Cun 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