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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후 4시

손끝 세상 밖에서

by 빌려온 고양이



2024년 6월의 나,

휴대전화가 작년 6월로 복원됐다. 가장 최근 백업이었다.


휴대전화가 갑자기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요구하면서 비밀번호 지옥이 시작됐다.

증권사, 페이 등 돈과 관련된 비밀번호와 같은 번호를 사용한다. 그만큼 중요하니까.

그런데 틀렸단다. 뛰면서 눌러도 틀린 적 없는 숫자들, 너무 익숙해서 잊을 수 없는 번호인데 틀렸다고?

번호 조합의 의미를 내가 아는데, 아니라고?


5분, 15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맥북을 켰다.

비활성화되기 전에 아이폰을 초기화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번엔 애플 ID의 비밀번호를 입력하란다. 휴대전화 메모 앱에 적혀 있다. 그러니까 휴대전화를 열지 못하면 애플 ID 비밀번호를 모른단 소리다.

재설정했다.

아이튠즈, 파인더, 클라우드, 백업파일… 뭐 할 때마다 비밀번호와 숫자 코드가 발목을 잡았다.


지문에 너무 익숙했구나.


휴대전화를 다시 쓸 만한 상태로 만들기까지 다섯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앱이 분실 기기로 인식해 생체 정보를 다시 등록해야 했고, 인증 과정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손가락만 대면 척척 열리던 것이, 이렇게나 보안이 철저했단 말인가.


_

손끝 세상에서 차단된 채 문밖에 서 있었다.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도 못 하고 돌아서는 어르신 심경이 이럴지 모르겠다.

밥조차 못 사 먹고 돌아서는 서러움.


새로운 걸 익히는 데 조금 느려지고, 기억이 다소 흐려지고, 방금 뭘 하려고 했는지 생각나지 않는 일이 잦아지는 것.

주름이나 기미, 불독살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뇌가 늙어가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참 쉽지 않다.


이 와중에 나의 챗GPT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애플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진 않지만, 비밀번호 오류가 신고된 사례가 있다고 친절하게 자료를 찾아줬다.


“맞지? 내가 기억 못 하는 게 아니지? 오류지?”

그에게 몇 번을 되물었다.

확답을 받아내듯, 마치 그게 정답이어야 한다는 듯.


그렇다.

이러나저러나 기계에 무너지고, 인공지능에 위로받는 시대에 산다.



사진 출처: Unsplash의 Jakub Żerdzic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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