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결혼 앞에선 누구나 속물이 된다.
10년 연애는 지켜냈다.
허나 ‘결혼’의 문턱 앞에서는 망설이던 나다. 프리랜서였던 나와 공기업이었던 그. 경기도와 부산이라는 장거리 문제의 문턱도 넘지 못했다. 누가 더 버는가? 누가 더 안전한 직장인가. 어느 지역 인프라가 더 좋은가. 집은? 2세 계획은? 등등 이밖에도 결혼이라는 목적지까지 가기에 넘어야 할 허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의 결혼관과 나의 결혼관, 10년이나 만난 세월이 허송세월이었나 싶은 순간은 여러 번 있었다. 너는 나와 가치관이 맞는가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그런 그와 앞으로 70년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질문에 나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A4용지를 꺼내고 반을 접어 한쪽엔 결혼을 해야 할 이유 vs 또 한쪽엔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될 이유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될 이유에 더 많은 답안들을 써 내려갔지만, 결혼을 해야 할 이유에 한 문장을 이기진 못했다. ‘그여야만 한다.’는 이유. 10년 동안 그는 무한 신뢰를 주었다.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그 어떤 흔들림에도 우뚝 서있던 사람이다. 하찮게 흔들려 요동쳐대는 나와는 다르게 그가 내게 보여줬던 믿음은 내가 그와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혼보단 다른 길을 택했다. 양가 부모님의 허락에 ‘동거’라는 길을 택했다. 확실하지 않은 사이를 동거라 하던가. 부정하진 않겠다. 이혼, 재혼가정에서 자란 두려움은 내게 너무나도 컸기에 ‘내 가족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의 마지막 관문 같은 거였다. 부모님들은 우리의 의견에 동의해 주셨고, 나는 그 길로 그의 집에 가서 함께 지냈다.
동거의 시작은 우리가 처음 만날 때 그때 느낌으로 데려다주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생활이 달랐던 우리는 사랑만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도 있었고, 확실하지 않은 사이가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여가를 보내는 시간도 다르고 생활습관도 달랐다. 다른 부분은 다 맞출 수 있었지만 생활습관은 맞추기 어려웠다. 다시 한번 우리 관계에 대해 재정비를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결론은 그래도 함께 나아가보기로 결정했고, 다름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 후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은 삐걱거렸지만 배려하는 대화를 나누며 좋게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동거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인식은 그리 좋지 않았다. 동거 후 처음 맞는 명절엔 각자의 집으로 명절을 보내러 올라갔다. 같이 살지만 가족은 아니었다. 이상한 관계, 책임지지 않는 관계, 너는 너, 나는 나. 이걸 바라던 건 아니었다. 다행히도 그와 나의 생각은 같았고 우리는 결혼을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결혼확정 이야기를 양가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상견례 일정까지도 순차적으로 잘 진행되었다. 하지만, 동거까지 순탄하게 흘렀다 하여 정식 상견례를 가볍게 생각했던 터일까. 우리 사이에 부모님이 들어온 순간 그와 나는 전쟁이 또 시작되었다. 예비 시아버지가 떠나시고 어머니께서 상견례 자리를 많이 어려워하셨다. 시아버지 자리를 대신해 어머니는 시고모님을 모시고 온다고 하셨고, 나의 부모님은 굳이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냐며 만남을 보류했다. 상견례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혼수 얘기를 하셨고 양가의 기싸움은 팽팽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우리는 회의를 나눈 후 ‘서로 오고 가는 마음 없이 자식들의 의견 존중’을 말씀드렸다. 우리 둘은 장남, 장녀 커플인지라 좀 더 현명하게 우리가 주최가 되는 결혼식을 하고 싶다고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 하지만, 결혼식 전날까지 싸우고 말았다.
처음 겪는 결혼 앞에서는 모두가 속물이 된 기분이었다. 네 부모, 내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네가 더 했다. 내가 더 했다. 계산적이었으며, 주최는 우리가 아닌 부모님들의 싸움으로 번졌다.
이걸 바랐던 건 아닌데..
결혼식 준비기간은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