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여도 괜찮다는 걸 알려준 사람
결혼할 거 아니면 니랑 안 사귄다.
자기 연민에 똘똘 뭉쳐 허우적대는 나를 신이 도와주긴 했나 보다. 내가 나여도 괜찮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나타났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마음은 하염없이 넓고 넓어 나를 포용하고도 더 주지 못해 안달 난 사람. 너 자체로도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내가 안식할 수 있던 사람.
나의, 2011년은 꽤나 따뜻했다.
봄은 두근거렸고, 여름은 황홀했고, 가을은 슬펐고, 겨울은 쓸쓸했지만, 따뜻한 온기는 나의 사계절을 내내 지켜주었다. 그 어떤 계절도 우리의 감정과 결부되지 않은 수식어를 달고 있지 않을 만큼, 해가 지나고 계절이 바뀌면서 다채롭고 새로운 감정들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를 만나 느낀 감정의 지층 그중에서도 제일 아래에 깔려 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는 날이었다. 그때 나는 이 계절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어떤 감정이었더라. 오래된 일기장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내가 여태 만나온 사람들과 그는 확연히 달랐다. 예상할 수 없는 긴장감을 주었고, 예상밖의 말들로 나의 궁금증은 증폭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그를 만난 후 나의 인생을 정의해 보자면, 나는 한편으로 조제 같은 아이였다. 이 영화 속,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은 '우연'과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함께하는 시간이 쌓여 추억은 늘어간다. 츠네오는 다리가 불편한 조제를 위해 유모차를 손수 만들어주고, 그녀를 태워 다닌다. 일상이라곤 유모차, 옷장, 헌책, 할머니가 전부였던 조제에게 츠네오는 새로운 세상과 경험을 선물한다. 조제도 츠네오에게 정성을 들인 요리를 대접하며 서로는 서로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
연애를 한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둘은 여행을 떠난다. 츠네오는 이미 몇 번 경험해 본 여행이었을지 몰라도, 다리가 불편한 조제에게는 생의 첫 여행이 특별하기만 하다. 조제는 한껏 들떠 새롭게 발견한 놀라움을 츠네오와 공유하지만, 츠네오는 그런 그녀가 조금은 성가신 듯 말을 자른다.
조제의 유모차가 고장이 난 탓에 여행을 하는 동안 츠네오는 조제를 업고 다니게 된다. 가려고 했던 수족관에 도착하니 휴무로 굳게 닫혀있는 문.
평생 보고 싶던 물고기를 보지 못한다는 것에 실망한 조제는 츠네오의 등에서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지르고 떼를 쓴다. 조제의 다리를 자청해 그녀를 업고 있던 츠네오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하다.
츠네오는 그 순간 '조제와의 차이'를 새삼 온몸으로 실감한다. '상대의 결핍을 나눠 감당하는 현실’은 사랑을 시작할 때 조제를 유모차에 태워 밀던 무게보다 한참 더 무겁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상대의 결핍을 나눠 감당하는 현실.
이 영화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대한 사랑의 얘기를 시작으로 때로 서글프며, 가끔씩은 아름다울 '사랑'의 이야기를 얘기한다.
비록 나는 조제와 같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부정만 경험했던 내 삶에 나타나 준 그는 츠네오 같았다. 내가 경험한 세계에서 사랑은 ‘가끔씩’만 아름다웠으며, 때론 비겁하고, 남루하고, 심지어는 영악했다. 믿었기 때문에 약점을 보여주었지만 그런 내 모습을 달가워하지 않던 (혹은 비난까지 하던) 상대방에게서 이별을 통보받기도 했고, 운명이라 여겼던 상대에게서 내가 먼저 권태를 느껴 도망치기도 했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아픔을 수반한다는 것을, 권태와 이별까지도 사랑의 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만 알던 내게 그가 나타난 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영화와는 다른 결말이었지만, 내게 나타난 그는 ‘8월의 여름 밤, 너라는 페어링’ 그 자체였다.
누구나의 사랑이 그렇듯 우리는 영화처럼 만나 불같이 사랑했고, 그 사랑은 끝사랑인 양 10년을 만났다. ‘결혼할 거 아니면 니랑 안 사귄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님을 입증했고, 그 말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우리는 남들과 비슷한 연애를 하며 미래를 그려나갔다.
'첫'이라는 단어는 참 애틋하다. 첫걸음의 순간도 처음 학교를 간 순간도 처음 혼자 살아본 것도 처음 겪은 순간들은 종종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다.
'첫사랑'은 참 맑고 예쁜 단어라 생각한다. 소중한 이름이라 아무 곳에나 붙이고 싶지 않은 아주 아끼고 아끼는 내 단어 스티커. 사랑은 시작만 해서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한다. 만남과 이별까지 사랑의 완성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은 불완전하다. 사랑의 끝이 어딘지 몰라서 계속 서투르니까, 완전한 사랑 없이 계속 노력하니까.
그래서였을까. 그와 나는 첫사랑을 끝사랑까지 완벽하게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