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는 해줄 수 있잖아.
/ 임신을 알게 된 날
결혼식 준비로 바쁠 때, 죽어라 싸운 우리는 우리가 이래선 안된다고 회포를 풀던 날이었다. 막걸리 몇 병을 거하게 마시고는 바람을 쐬러 베란다 밖으로 나가는데 가슴에서 전기가 통하는 신호를 받는 나다. 생리 기간에 느끼는 가슴통증과는 다른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바로 편의점으로 달려가 테스트기를 구매했고, 결과는 두줄이었다.
“하... 이거 봐. 두줄이야.........”
“헙.........! 내일 병원 가보자! “
두렵고 무서운 나와는 달리 그는 놀랐지만, 놀라지만은 않은 눈치다. 나의 두려움은 그의 표정도 그의 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컸었다. 다음날 바로 산부인과로 향했고, 초음파를 몇 번 문지르던 의사 선생님은 병원이 떠내려가라 소리치셨다.
“축하드립니다!!!!!!!! 5주예요!!!!!!”
5주라고?.. 오 마 이 갓. 진짜 임신이라고?
결혼 전 임신이라니. 부모님께 알려야 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다. 아마 둘 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서 그런지 우리에겐 축복이지만, 한편 걱정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웠고, 막막했다. 심장소리까지 듣고 난 후 알려야 할까 하다가 6주쯔음 밝혔던 것 같다. 엄마의 반응은 예상이 되었다. 달가워하지 않거나 말이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의 어머니의 반응도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아이고, 뭐 이리 급하니. 결혼식 하고 갖지 그렀니.."
엄마의 반응도 다르진 않았다. 전화로 임신소식을 알렸는데, 잠시 말이 없던 엄마는 축하한다는 말이 없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지 않아서일까. 양가 부모님의 반응은 서운함을 넘어 야속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건 12월쯤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곧 설이 다가왔고, 설에는 각자의 친척집으로 가서 결혼소식을 날릴참이었다. 가족들과 큰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결혼소식을 알렸고, 나는 큰집 큰엄마를 도우라는 엄마의 눈치다.
음식냄새를 맡으니 입덧증세가 나타났다. 우리 집과는 다른 냄새, 한껏 예민해진 후각과 오감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도저히 서있을 수 없어 힘든 기색을 팍팍 냈더니 엄마는 혀를 끌끌 찬다. 나는 큰엄마네 안에서 나갈 수는 없고 2층 다락방에 올라가 음식냄새를 피했다. 왁자지껄 1층에서 떠드는 소리가 났지만, 아무도 나를 찾질 않는다. 계부의 친척 즉 나랑은 피가 섞이지 않은 그들은 내가 그러고 있든지 말든지 상관할 바가 없다. 그것도 그거지만, 엄마는 나를 부끄러워했다.
뭐 그럴 수 있다.
결혼도 안 한 친 딸이 동거하겠다고 내려가서 결혼 준비 한다고 하더니 임신까지 해서 오다니 엄마 딴에는 부끄러웠단다. 당시 엄마는 내게 수치스럽고 쪽팔렸다고 했다. 축하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배려도 바라지 않았다. 그냥 차라리 그런가 보다 하고 무관심이라도 주길 바랐던 거 같다.
/임신, 축하는 해줄 수 있잖아.
어차피 잘 된 일이다.
나를 동정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던 외가친척들이 모여 살던 동네도 떠났고, 지긋지긋한 엄마아빠와도 떨어져 살 수 있다. 어차피 내가 가장 지키고 싶었던 내 가정을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엄마는 내가 엄마랑 같이 살던 동네를 떠나는 날까지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고, 그렇게 나가라고 하더니 속이 후련한 눈치였다. 나는 비혼주의로 살거나 혹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면 절대 이혼은 하지 않으리라. 내게 자식이 생긴다면 내가 느낀 이 감정은 절대 알려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기에 오히려 엄마가 인정해 주거나, 우리 딸 임신했냐고 고생했냐는 걱정 따윈 차라리 안 해주길 바랐었다. 우리 둘 모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임신은 나를 힘들게 했다.
10달 내내 나는 입덧에 시달렸고, 어떻게든 나는 엄마에게 기대지 않았다. 임신 내내 이 먼 지역에 내려와 보지도 않았고, 나는 가끔 가족들 보러 올라가면 엄마아빠를 피했다. 어느 정도 도리만 했다. 나를 힘들게 한건 가족들이었다. 말 한마디는 비수로 다가와 또 나를 찌르기 일쑤였고, 이건 내 아이를 지켜야 하는 호르몬의 지배 따위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 했지만, 호르몬인지 예민함인지 내면아이인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힘든 결혼식을 끝내고 난 후 힘든 임신기간을 보내던 찰나 내 가족이 아닌 그의 어머니가 또 한 번 나를 찔렀다.
예식준비부터 순탄한 길은 없었다.
시어머니 입에선 계부, 친부, 큰엄마의 존재 등 나를 무시한 건지 나를 인정하지 않은 건지 의도조차도 모를 말을 쏟아냈고, 단단하던 그와 나 사이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지우자. 이런 사람인지 몰랐다는 싸움을 시작으로 나는 10대의 그날, 엄마가 나를 절벽 끝으로 몰던 날 그날처럼 나를 자해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이런 모습을 보여야 그를 휘어잡을 수 있다는 폭력적인 생각에 그를 겁에 질리게 만든 것이다.
날이 잔뜩 서 잔뜩 피폐해진 내게 그 누구도 다가올 수 없었을 거다. 아이의 아빠가 될 그도 그때의 나는 괴물 같았다고 한다. 남들은 온화하게 아이를 위한 태교를 한다지만, 나에게 태교는 내 아이를 나처럼 불쌍한 아이로 만들기 싫은 일종의 책임감 이런 게 진화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기저귀도 채 떼지 못해 유기경험을 하게 된 나라는 아이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나는 절대 이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으리라 암묵적으로 다짐했던 건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