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대화에서 배운 경계의 기술
요즘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왜 항상 내가 이해해야 하지?”
서로 다른 세대를 살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나면, 누가 먼저 이해하느냐의 싸움이 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먼저’는 늘 자식의 몫이다.
며칠 전, 엄마와 통화를 했다.
내 가게 운영 얘기였다. 나는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고, 내 가게 운영에 큰 힘을 준 엄마 친구 이모와의 비교 얘기다. 이모는 이미 오래된 손의 감각으로 화구 11개를 돌리고 있다. 그런데 엄마는 묻는다.
“이모는 그만큼 벌던데, 넌 왜 그거밖에 안 나오냐?”
“그거 받아서 뭐 하냐, 그렇게 해서 돈이 되겠니?”
“다른 메뉴는 언제 배울 거야?”
말 하나하나가 내 안의 공기를 빼는 바늘 같았다.
아직은 배우는 중이고, 이제 겨우 제대로 해 봐야 반년도 안 됐는데, 몸에 익혀가는 과정인데, 엄마의 눈에는 결과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엄마의 틀에 나를 맞추려 하지 마.”
“이제 해봐야 제대로 한 거 3개월인데, 가따부따 하지 마.”
엄마는 짧게 말했다.
“참 너는 나랑 삶도 다르겠지만, 이해 안 가는 부분이 많아. 어휴 알겠어.”
뚝, 통화가 끊겼다.
그날 밤, 한참을 멍하니 앉았다.
왜 나는 늘 엄마의 언어를 해석해야 할까.
왜 늘 ‘엄마 세대는 표현이 서툴러서 그래’라며
내가 이해해야 할 쪽이 되어야 할까.
그건 아마,
엄마의 말 뒤에 숨어 있는 ‘불안’을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 세대는 ‘결과로만 인정받은 세대’다.
“이모는 잘하던데 넌 왜?”라는 말은, 사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엄마는 내 삶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그 밑에는 “내가 살아온 방식이 맞았다는 증거가 되어줘”라는 조용한 바람이 깔려 있다.
그걸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는데, 엄마를 이해한다는 건, 엄마의 불안을 대신 짊어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경계를 지키는 일이어야 한다는 걸.
그래서 나는 요즘, ‘이해’ 대신 ‘경계’를 배운다.
엄마가 비교할 때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엄마 방식이고, 나는 내 방식으로 해볼게.”
간섭할 때는
“그것도 생각 중이야. 근데 지금은 내 일정이 있어서 때 되면 할게.”
걱정으로 포장된 간섭엔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근데 이건 내가 직접 해봐야 감이 올 것 같아.”
이해 못 하겠다고 말할 때는
“생각 다를 수도 있지. 난 이쪽으로 해볼게.”
이건 반항이 아니라,
내 삶의 속도를 지키는 문장들이다.
엄마를 거절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지켜내는 언어.
이제 나는 엄마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엄마의 세상을 존중하면서도 내 세상을 침범당하지 않기로 했다.
이해 대신 경계.
그게, 성인 자식이 되는 첫걸음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엄마, 나는 당신이 만들어준 세상 밖에서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어요. 잘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믿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