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듯, 아닌 듯한, 말들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김이강]

by stay


바람 부는 날에 우리는


바람 부는 날에 알게 되었다

슬픔에 묶여 있는 사람들의 느린 걸음걸이에 대하여


고요한 소용돌이에 대하여

줄을 풀고 떠나가는

때 이른 조난신호에 대하여

삐걱삐걱 날아가는 기러기들에 대하여

아마도 만날 것 같은

기분뿐인 기분

아마도 바위 같은

예감뿐인 예감


어디선가 투하되고 있는 이것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구부려도 펴도 나아지지 않는.




글쎄 서울엔 비가


오늘은 폴린느가 결혼을 한다고 했는데

미쿡인 신랑과 강원도 산골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는데


글쎄 서울엔 비가 내리네

강원도에는 눈이 내리겠지


헐거운 레포트를 쓰던

대학 시절이 지나가네


헝클어졌던 의자들을 한 개쯤 접어야할지

한 개쯤은 남겨두어야 할지

생각이 신통치 않네


느닷없는 새 한 마리 날아와

글쎄 마구를 날개를 치네

실체도 없이

그리움만 서성이네


담담하게 가난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의 두 번째 문장이었지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1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당신은 말한다 조용한 눈을 늘어뜨리며


당신은 가느다랗고 당신은 비틀려 있다


그럴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가만히, 당신은 서 있다 딱딱한 주머니 속으로

찬 손을 깊숙이 묻어둔 채 한동안 오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

행인들에게 자꾸만 치일 것이고

아마도 누구일지 모르는 한 사람이 되돌아오고

따뜻한 커피를 건넸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갔던가


2

오늘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장을 읽고 있다

이 책을 기억하는지

연필로 한 낙서를 지우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내게

겨울에, 당신은 묻는다 아무래도

이 책의 삼십칠 페이지에 있는 글씨가 내 글씨 같다고

안녕? 페이지 숫자가 마음에 든다


3

편도를 타고 가서 돌아오지 말자.

옆 테이블에서 젊은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말들 끝에 찻잔을 비우고 헤어진다

희미한 그림자들로 어떻게

대낮의 거리 한복판을 버티어낼까 망설이며

길 끝으로 사라져가고 있을 것이다


4

어느 거리에선가,

당신은 누구일지 모를 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가느다랗고, 비틀리는 누군가를

그리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시인 김이강

1982년 여수에서 태어났다. 2006년 [시와 세계]로 등단했다. 시집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가 있다. 제2회 혜산 박두진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7027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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