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5시 38분. 8월 말 아침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았다. 뒷짐을 지고 아주 천천히 걸음을 음미하며 부산 해운대의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내 왼쪽으로는 바다, 오른쪽에는 모래사장이었다. 바다와 땅이 맞닿는 경계 부근을 맨발로 걸었다. 모래사장은 까끌까끌하기도 했지만 따스했고, 바닷물은 보드라웠지만 차갑기도 했다.
해변의 가운데쯤까지 갔을 때 잠깐 쉬고 싶어 걸음을 멈추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바라봤다. 일출 전이라 아직은 어둑해서인지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했다. 그래서인지 바다는 더 높고 넓어 보였다. 드넓은 푸른 대기가 내 몸으로 밀려 들어와 혈액을 힘차게 순환시키는 것 같았다. 몸 깊숙한 곳에서 꿈꾸고만 있던 것들을 당장에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활기가 느껴졌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래사장에는 해수욕장 개장을 위해 파라솔과 의자를 설치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삶이 있었다. 모래사장 뒤로는 높고 낮은 빌딩 등성이가 보였다. 월요일 아침이라, 산책하는 사람들 틈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보였다. 오늘 휴가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면. 나 또한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다시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젖은 모래사장 위로 내 무게만큼 발자국이 파였고 곧 파도가 일어 발자국을 지웠다. 바다가 자꾸, 내 무게를 지우는 것 같았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책임의 무게 같은 것. 사회의, 혹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해내야 할 의무의 무게 같은 것. 그런 것들을 다 지우고, 당장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바다의 조언대로, 나를 무겁게 하는 것들을 벗어 던지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볼까. 한번 주어지는 삶이고, 앞으로 얼마나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삶인데. 오늘 서울로 올라가면, 회사를 언제 어떻게 그만둘지 당장 계획을 짜고 배낭 하나 메고 여기저기 유영하며 살아볼까. 그러면서 글만 쓰는 거야. 내가 어떻게 창작자가 될 수 있겠어 라는 의구심과 불안함을 버리고, 꿈꾸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보는 거야.
생각만으로도 들썩거리는 마음 때문에,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빨리 해변 끝까지 걸어가 모래를 털고 신발을 신고 싶었다. 당장에라도 생각을 실천하고 싶었다. 빠르게 걷던 중, 50m쯤 앞에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4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였다. 그는 흰색 반소매셔츠에 회색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양말과 신발, 서류 가방은 바다가 닿지 않는 모래사장에 둔 채, 본인은 바지 아랫단을 무릎 위까지 올려 바다의 끝에 발을 담그고 꼿꼿이 서 있었다. 그 자세로 바다 앞에 넋을 놓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그의 뒤쪽에 서서 그와 그가 바라보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도 나처럼 현실이 답답하고 무거운 걸까. 하고 싶은 것을 가슴에만 품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곧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바닷속으로 뛰어 들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담담하게 자신을 컨트롤 하는 것처럼도 보이기도 했다.
5분 정도는 꼼짝도 안 하던 그가, 갑자기 기지개를 쫙 켰다. 양손을 양쪽 허리에 받치고 목을 두 번 돌리고는 좌우로 꺾어, 개운한 뼈 소리를 냈다. 뒤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 서류 가방, 신발, 양말을 들고 모래사장을 걸어 인도 쪽으로 나아갔다. 갑갑하고 어두운 표정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의욕적이고 힘찬 표정이었다. 저 표정이라면 그의 하루 또한 의욕적이고 힘찰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꿈은 품되,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도 내 역할을 내려놓고 창작에만 몰두한다면, 당장은 자유로운 기분에 붕 떠서 가볍고 즐겁겠지만, 곧 생활고에 짓눌리고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에 마음이 조급하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 고립 될 수 있겠지. 드넓기만 한 자유가 오히려 무겁게 나를 압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좀 전까지 들썩거렸던 마음이 서서히 차분해졌다.
어쩌면, 진정한 자유로움이란. 꿈과 현실, 가벼움과 무거움, 보드라움과 까끌까끌함, 따뜻하고 차가움 간에 어떤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멍해진 채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파도가 셀 때는 바다 끝이 내 왼쪽을 스쳐 오른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 오른쪽을 스쳐 왼쪽으로 쓸려 내려갔다. 몸에 힘을 풀고 있으니, 쓸려 내려가는 바닷물과 함께 몸이 바다 쪽으로 딸려 들어갈 것 같았다.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허리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바다와 땅의 경계에서도 균형을 잘 잡고 걸어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