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울 삶
나는 우리집 식구들 중에 제일 먼저 퇴근해서 집으로 귀가했었다. 그래서 내가 들어가는 집은 늘 깜깜하고 썰렁했다. 그러다 학교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있던 나리가 본가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는 집에 퇴근하는 나를 반기는 누군가가 있는 듯해서 쓸쓸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좋은 기분은 그닥 오래가지 못했다.
나리는 집에 온 지 한 달 반 정도 되었지만 그동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본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퇴근하고 돌아와서까지 그대로였다. 처음엔 그냥 종강도 했겠다, 맘 편히 쉬고 싶은가 보다 생각했지만 나리의 상태가 꽤 심각하다는 것을 그리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나리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잠을 잤고, 끼니를 챙겨 먹지 않아서 점점 말라갔다. 표정에는 생기가 없었고, 훌쩍이는 소리도 꽤 자주 들렸다. 그런 나리를 달래도 보고 위로도 해보고 안아주기도 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는 퇴근을 하고 집에 왔는데 나리가 아무도 없는 집처럼 불을 다 꺼놓고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는 거다. 그런 나리에게 밖에 산책을 다녀오자고, 아니면 혼자 카페라도 다녀오라고 했지만 나리는 싫다고 했다. 밖이 너무 춥다는 이유였다. 한참 옥신각신 하다가 나도 포기해 버렸다. 다음 날 출근 준비를 하고서 잠들어있는 나리의 방에 들어가 포스트잇을 찾았다. 핑크색 포스트잇에 아무 펜이나 집어 들고서 짧은 몇 마디를 남겼다.
오늘은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
카페라도 다녀오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사랑해.
너무 지쳐서 힘이 안나는 사람한테 힘을 내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찝찝했지만 그대로 두고 얼른 나와버렸다. 물론 그날도 나리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이후로 더 여러 날동안 그랬다.
나리는 꽤 오랜 기간을 무기력하게, 히키코모리처럼 시간을 보냈다. 나리가 다시 삶에 활력을 찾는 데에는 2-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그런 나리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도우면서 알게 된 사실은 대단한 것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그저 좋아하는 그릇에 음식을 예쁘게 담아서 먹는 식사, 하루를 마무리하며 적는 일기, 편안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어쩌다 듣게 된 인정과 칭찬, 자신을 위한 적당한 소비, 누군가 내민 관심... 이런 미약해 보이는 것들이 무기력에 빠진 우리를 굴러가게 해주는 힘이 된다.
누구에게나 무기력증이 찾아온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나 실패를 경험했을 때는 물론 심지어는 가던 길을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가도 예상치 못하게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아무것도 안 하고 자신의 삶을 방치하기보다 아주 미약한 저 힘들을 믿어보는 게 좋다. 무기력에서 벗어나보려고 대단하게 발버둥 칠 필요도 없지만 힘을 몽땅 빼버린다고 해서 힘이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닐 테니까 말이다. 분명 천천히 생각해 보면 작은 용기라도 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혼자서 도저히 안된다면 내가 쓴 포스트잇 쪽지처럼 누군가 내민 손을 붙잡기만 해도 된다. 나를 향해 내밀어준 관심과 손길도 천천히 둘러보면 분명 보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삶 자체 만으로 가치 있다.
누군가는 삶의 가치란 자신만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세팅하는 거라고 설명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놓인 환경으로 인해 삶이 흔들리고 망가진다 할지라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은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심지어는 당신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삶은 귀중하게 여김을 받을만하다. 그러니 무기력이 덮쳐올 때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어두운 날이든 밝은 날이든 아주 작은 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나는 내 삶을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 넣고 싶다.
어떤 날은 어두운 색, 어떤 날은 밝은 색이겠지만 날마다 무슨 색으로든 채워 넣을 거다.
되도록이면 아무 색도 채워지지 않는 날이 없도록.
무슨 색이든 찍어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