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가 말했다. "니가 뭔데 날 평가해"
지금까지 가히 평가의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나는 꽤 모범생이었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나를 죽이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나에겐 중요한 가치였고, '칭찬'을 받기 위한 인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안다. 그것이 사회의 틀에 나를 억지로 계속 끼워맞춰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2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나는 더 혹독한 평가를 받아야 했다. 마치 잘 만들어진 공산품 인형처럼 사회가 보고싶은 모양으로 나를 깎아내야 했다. 나 같은 인형은 진열대에 수도 없이 많고, 기업에서 혹은 사회에서는 고만고만한 그 인형들 중에 불량품은 골라내버린다. 그리고나서도 게 중에 가장 잘 만들어진 것을 어떻게든 골라내고 싶어한다. 탈락된 인형들은 다시 한 번 본인을 점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기업의 눈에 들기 위해 본인을 깎아내고 또 깎아낸다.
사회화는 그저 공공윤리나 공중도덕을 각 개인에 스며들게 하는 것일뿐, 똑같은 공산품을 만드는 과정은 아니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잘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사회화는 그것을 가르치는 과정이기에 나는 사회화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평가로 사람을 재단하는 것이 이젠 불편하다.
콘텐츠를 기획하는 수업을 들었었다. 내가 기획한 콘텐츠가 신나게 까였다. 까인 이유는 목적에 맞는 콘텐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평가하는 사람이 내 기획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기획안 자체로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평가자가 제시해주는 모범 예시는 흔해 빠져 닳고 닳아버린 콘텐츠였다. 더군다나 독자는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결정적으로 내 인상을 찌뿌리게 했다. 나는 그런 걸 배우려고 이 수업을 들은 것이 아니다. 흔하디 흔한 콘텐츠를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를 배우고 싶었다면, 내 돈 주고 이 수업을 듣기보다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콘텐츠들을 내가 직접 읽고 분석했겠지.
독자는 실체가 없다. 사람의 취향은 너무나 다양해서 내가 기획한 것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평가자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다른 사람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고는 위험하다. 평가자는 심지어 독자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떠먹여줘야 한다'는 표현을 썼다. 나도 독자이다. 나도 쉬운 글을 선호하지만, 글을 읽을 때 그 글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읽은 적이 없다. '떠먹여줘야 한다'는 표현은 나로서는 독자 비하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 콘텐츠는 2-30대를 겨냥한 콘텐츠였고, 독자 수준에 비해 내가 그렇게 어려운 것을 쓴 것도 아니었다. 사실 내가 그런 수준이 되지도 않는다. 수준에 맞지 않게 과장해서 괜히 어렵게 기획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사회에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더 높은 가치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가치가 있다. 심지어 예술 분야도 더 높이 쳐주는 것과 등한시되는 것이 있다. 나는 이 가치들이 도대체 어떤 근거로 형성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놈의 대중성이니 작품성이니 음악성이니, 그것이 실체가 있느냐는 말이다. 결국은 주관적인 가치들이고 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뿐 모든 주관적인 가치에는 각자의 취향이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평가자들이라는 분들은 본인들이 하는 것이 다 맞다고 어떻게 자부할 수 있는 건지 그것이 의문이다. 물론 공부를 많이 했을테고, 많은 상황을 봐 오면서 나름의 기준이 생겼고 작품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눈이 생겨 그 자리에 앉은 것이겠지만 과연 그 기준들이 공평하고 공정한지에 대한 의문은 버릴 수가 없다.
나도 평가를 한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저러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도 재밌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들의 실체와 근거는 어디에 있고 내가 무슨 자격으로 평가를 할 수 있는건지, 그저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는 아니었는지, 내 취향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를 생각해보게 되면서 '맞다, 틀리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는 신중히 하게 되었다. 다만 나와 '맞다, 다르다' 정도의 취향 부합 문제로 가볍게 얘기할 뿐이다. 인간 사회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이 사회가 정해놓은 평가 기준에 당연하다는 듯이 순응하기 보다 비판적인 시선으로 본인만의 평가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을 주관이라고 부르고, 그 주관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주관을 잘 정립하는 것이 좋은 인간이 되는 길이 아닐까. 더 나아가 이것이 인문학을 공부해야하는 이유이고 내 기획안을 평가했던 사람처럼 평가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잘 판단해야하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평가를 받긴 싫지만 평가를 하겠다는 모순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평가를 받는 것에는 열린 마음으로 듣되 나의 주관과 비교하여 비판적 수용을 할 줄 알아야하고, 평가를 할 때는 내 말이 다 맞다는 듯이 말하기보다 의견을 제안하는 느낌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혹여 내가 평가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나의 평가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그에 따라 생기는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평가해야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 기획안을 평가한 사람은 그런 미숙한 평가로 인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신뢰도가 반토막이 났다.)
나의 평가 기준이 모든 사람들을 아울러 다 똑같이 적용되는 것인지, 어떤 편견이 있진 않은지, 혹시 편견을 갖고 있더라도 그 편견이 평가를 받는 이들에게 수용 될만한 편견인지 등등 보다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하며 더 좋은 평가, 더 좋은 판단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 맘대로 평가하다간 제시가 한 마디 할 것이다.
"니가 뭔데 날 평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