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생이

20.08.01.

by 준혁H





어릴 때부터 비교적 학업 성적이 우수한 편이었고

남들 앞에서 성격이 고순고순한 편이었던

나의 등 뒤엔 학창 시절 내내 '범생이' 딱지가 굳게 붙어있었어.
실습도 체육도 오락도 그닥 잘하지 못한 데다가
성향도 일반적인 남자애들과는 다른 기질이었으며, 심지어 마르고 작은 체구에 지독한 안경잡이였으니... 누가 봐도 범생이 하면 떠올리게 되는 스테레오타입 그 자체의 모습이 아니겠어?

이런 나에게 주위 어른들이 줄곧 하시는 말이 있었어.
“공부 잘하게 생겼네”
열여덟 전까지만 해도 그저 좋은 칭찬으로만 여겼지. 그런데 민증을 받게 되는 나이를 먹고 난 후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열등감이 깊어갈 무렵부터 그 표현을 마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엔 어려웠어. 오히려 괜히 더 싫증 나기도 했어서, 일부로 아니라며 맞받아치는 변명 아닌 변명을 더하기도 했어.

'지적이다', '똑 부러지다'라는 말과는 분명 달랐지. 범생이라는 이름표에는, 어떤 외면적 부분을 특정하게 가리키는 의미나 의도가 새겨 있었거든. 예전부터 지녀왔던 그 지긋지긋한 여러 모습들. 모범생이라는 이미지로 감싸진, 하지만 실은 하찮고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들. 자아의 다른 조각을 흐리게 가려버리는 것들. 오히려 목을 숨 가쁘게 조여 오는 족쇄 같은 것들.


'범생이'는 이제 내겐 더 이상 호평이 되지 못해.
과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난 그 단어와 그 주위를 둘러싸는 나에 대한 수식어를 찌질하고 갑갑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어. 끌리는 매력도, 괜찮은 볼품도, 견고한 의미도 부족해 아주 변변찮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야.
어느새 두터운 콤플렉스가 되어버린 그 표현이
더 이상 내 모습을 가로막지 않기를 원하면서, 나는 대학 입학 이후 내가 서 있는 세계를 새로이 넓히고 새로이 칠하려고 했던 거야.



몇몇 작업과 활동으로 황준혁이라는 사람이 가지는 여러 방향의 면을 겉으로 드러내고자 했어. 삶을 재미나게 지내기 위해서 즐겨하는 문화생활에 상당한 돈과 시간을 들이곤 했어. 주변의 일반적인 기준과 시선에 더욱 신경 쓰면서 행동 하나하나를 되새기도 했어. 가끔씩은 무모하거나 과감한 일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기도 했어. 나름대로 다채롭고도

다이나믹하게 꾸려간 것 같았지.

그럼에도 그 표현이 파낸 자국은 내 옆과 뒤에서 쉽게 지워지지는 않는 것 같애.

여전히 내가 있던 세상은 특정 부분에만 갇혀있고

여전히 내가 겪은 이야기는 모자람이 맺혀있어. 여전히 내 외형은 지난날들과 별 다른 게 없고
여전히 내 본연은 다분히 유별나게 여겨지지.
아직도 사람들은 나를 범생이의 틀로 바라보는 듯해. 과거에 듣던 그 뻔하고 훤한 말들이 현재에도 내 귀와 등에 꽂히고 있으니깐. 아니 어쩌면, 내가 그 틀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일 수도.

희망이라든가 소원이라는 거, 내겐 별다른 게 아니야. 단지 지독하게 이어져 온 그 자국이
나를 깊게 파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야. 그 표현이 휙 떨어져서, 다른 무늬를 지닌 표식들이 선명하게 보이길 원하고 있을 뿐이야. 그래야만 나라는 존재가 비로소 그나마 매력 있고 볼품 있고 의미 있어질 테니까. 자격지심으로 보여진다 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지금의 나는 그 자국이 얼룩으로 변해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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