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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지는 이륙 후 공개됩니다. 설렘을 준비해 주세요

스칸디나비아항공(SAS)은 목적지를 감추고, 감정을 설계했다

by 쥰쓰

“비행기 출발 후 두 시간이 지나면, 그제야 도착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처음엔 장난처럼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문장은 현실이었고, 그 장난 같던 문장이 수많은 클릭을 이끌어냈습니다. 누군가는 목적지도 모른 채 항공권을 기꺼이 선택했고, 누군가는 오직 ‘XXX’라고 적힌 탑승권을 들고 미지의 여정에 올랐습니다.


2025년 2월, 스칸디나비아항공(SAS)은 유로보너스(EuroBonus) 회원을 대상으로 도착지를 출발 직전까지도 공개하지 않는 ‘미스터리 항공권(Destination Unknown)’을 선보였습니다. 그 결과는 단 4분 만에 전석 매진.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지금의 여행 소비자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목적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해 냈습니다.


알고 가는 여행보다,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 더 강렬할 수 있다는 것, 승무원조차 모르는 도착지에 몸을 실은 채, 사람들은 정보가 아닌 감정으로 움직이는 여정을 선택한 것입니다.

도착지를 몰라도, 감정은 더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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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는 넘치고, 감정은 부족한 시대

우리는 지금, 과잉된 정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디서 사진을 찍으면 좋을지, 어떤 식당이 지금 가장인기 있는지, 수많은 플랫폼은 알고리즘의 예측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선택지를 던져줍니다. 검색 한 번이면 취향이 분석되고, 후기가 쌓이며, 추천은 정밀해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잘 정돈된 여정 속에서 우리는 언제 마지막으로 '감정'을 느껴봤을까요?


선택은 쉬워졌지만, 그 선택이 어떤 울림을 남겼는지 되묻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SAS는 이 질문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던졌습니다. “그 많은 정보를 알고 난 후, 당신은 무엇을 느꼈나요?” 도착지를 감춘 항공권은, 상상력을 되살리기 위한 아주 정교한 실험이었습니다.


알고 있다는 안도감 대신,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상상력, 예측 가능한 만족감보다, 예측 불가능한 떨림, SAS는 이 실험을 통해, 넘치는 정보의 시대에 감정을 중심으로 한 ‘서사의 공백’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백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었습니다.

알고 있어서 편한 여행보다, 모르기 때문에 설레는 여정이 더 오래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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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할 수 없을 때, 감정은 오래 남는다

익숙함은 빠르게 사라지지만, 낯설고 불완전한 감정은 오래도록 머뭅니다. 인간의 뇌는 이미 알고 있는 자극보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훨씬 더 강한 반응을 보이며, 이때 분비되는 도파민은 일상의 자극보다 최대 150% 이상 증가해, 감정을 강하게 각인시킵니다. 우리가 말하는 ‘기억에 남는 경험’이란, 사실 이 신경생리학적 리듬 위에 놓인 감정의 흔적입니다.


SAS는 이 감정의 구조를 그들의 항공 서비스에 정교하게 이식했습니다. 기장만이 알고 있는 도착지, 공항코드 대신 ‘XXX’로 표기된 항공권, 그리고 비행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목적지까지, 이 모든 구성은 예측 불가능한 순간을 감정의 서사로 엮어내는 섬세한 장치였습니다.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습니다. 2024년 첫 론칭 당시, 참가자 중 무려 96%가 “다시 참여하겠다”라고 답했고, 2025년 2월 재오픈된 항공편 역시 단 4분 만에 전석이 매진되며, 이 실험이 단발적인 호기심을 넘은 브랜드 경험의 정서적 반복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증명했습니다.

익숙한 정보는 흘러가고,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은 오래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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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위에 설계된 가격, 신뢰의 구조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건, 이 항공권이 ‘현금’으로는 절대 살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오직 하나의 방식, SAS 멤버십 포인트인 유로보너스(EuroBonus)만 예약이 가능했고, 그 조건은 단순한 마일리지 소진을 넘어선, 하나의 질문이었습니다. 브랜드가 고객에게 던지는 묵직한 정서적 메시지였죠.


우리는 그것을 ‘포인트’라 부르지만, 그 순간 그것은 하나의 감정 티켓이었습니다. 포인트라는 숫자는 단순한 가격표가 아니라, 감정이 설계된 세계로 입장할 수 있는 통화로 기능했고, SAS는 그것을 통해 말없이 묻습니다. “당신은 이 브랜드에 얼마만큼의 신뢰를 쌓아왔나요?”게다가 이 구조는, 가격에 대한 불안까지 설계적으로 해소하고 있었습니다.


예약 시점이나 좌석 수요에 따라 요동치는 항공권 가격 대신, SAS는 조건을 단일 포인트로 고정하며 하나의 신뢰를 심었습니다. 감정은 예측할 수 없지만, 가격은 믿을 수 있다는 약속이야말로 예측 불가능한 여정의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안전장치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여정은 특정 세대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었습니다. SNS에 남겨진 후기들을 따라가 보면, 호기심 많은 MZ세대뿐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와 라이프스타일의 사람들이 이 실험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있었죠. SAS는 ‘모험은 젊은 이들의 것’이라는 낡은 명제를 조용히 무너뜨렸고, ‘예측 가능한 일상보다,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을 원하는 것은 세대를 초월한 본능임을 다시금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감정을 설계하면, 가격은 신뢰가 되고 신뢰는 다시 감정으로 환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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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콘텐츠가 될 때, 브랜드는 물러선다

#flysas 해시태그로 생성된 SNS 콘텐츠는 15,000건을 돌파했고, SAS가 직접 만든 콘텐츠보다 3배 넘는 참여율을 기록했습니다. 그 어떤 광고 문구보다 강력했던 건, 브랜드가 설계한 감정을 직접 경험한 고객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목적지를 모르고 떠났지만, 돌아와서는 그 여정을 말하고 싶어 졌습니다. 브랜드는 앞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감정의 무대만을 설계했고, 그 위에서 움직이고 말한 것은 고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발적으로 생성된 감정의 이야기는, 오늘날 브랜드 충성도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그 여정에서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를 상상합니다. SAS의 미스터리 항공권은 그 구조를 감정 중심으로 재설계한 프로젝트였고, 그 실험은 여행이라는 상품이 결국 정보가 아닌 감정으로 소비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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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의 도착지는, 세비야였습니다

2025년 4월 4일부터 7일까지, 미스터리 항공권의 탑승자들이 도착한 그곳은 스페인 남부의 도시, 세비야(Sevilla)였습니다. 플라멩코의 리듬이 흐르고, 햇살 가득한 골목이 이어지며, 사람들은 ‘몰랐기 때문에 더 선명했던 감정’을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예고 없는 여정, 예측할 수 없었던 순간들 SAS는 목적지마저 하나의 서사로 설계했고, 그날의 스페인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한 감정의 잔상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여행에서 설계해야 할 것은 정보가 아닙니다. 위치나 혜택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를 소비자가 직접 완성하게 될 때, 그 여행은 ‘다시 떠날 이유’를 갖게 됩니다.

기억에 남는 여행은 장소가 아니라, 감정을 설계한 시나리오였습니다.

이미지 소스 출처: 썸네일 Unsplash, 본문 Unsplash, SAS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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