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탈을 쓰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지만 어제 밤 늦게까지 먹은 앱생트로 몸이 말이 아니다. 그래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화단에 태양빛을 받은 해바라기를 바라본다. 2송이를 꺾어서 침대 위에 놓는다.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 무어라도 그려야 하는 심정이다. 테오에게 미안해서라도 허송세월을 보낸다는 이미지를 보여서는 안 된다. 비싼 모델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으니 주변을 살피고 눈에 보이는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나는 유독 해바라기를 좋아한다.
활활 타오르는 태양을 닮아 보고 있노라면 나의 초라함이 녹아버린다. 주변 예술가들이 성공을 하여 벅차오르는 외침이 밤새 여기저기 들리는데 나의 작품에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는 이가 없다. 예술에 대한 생각과 깊이는 활활 타오르는 태양, 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와 동일한데 어떻게 인기가 없는지 요즘 들어 더욱 심기가 불편하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벌써 8년이나 흘렀는데 시들어 버린 2송이의 꽃처럼 일어서지 못할까 봐 미술을 하며 성공하지 못할까 봐 두려움이 앞선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를 생각하면 붓질을 당장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다. 풀이 죽어 말라비틀어진 그 해바라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싹 마르고...
동강 잘려나간 모습이 내 신세와 같다_고흐
'다시 일어서리라. 더 힘차게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리라.' 비록 헤어진 연인이 떠나서 우울함에 치를 떨지만 말라비틀어진 가지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도 동생에게도 현명한 판단이라 생각한다. 세가토리가 가지고 있는 허영심과 예술가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진 그녀를 놓아주기로 결심한다. 저 그림의 해바라기처럼 홀로 뒤를 보고 뚜벅뚜벅 걸어 나아가는 그녀를 응원하기로 했다.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방향을 설정해서 가고 있으니 헤어진다고 낙심할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것이 그녀와 나에게 커다란 축복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오직 테오만이 나에게 위안을 준다. 테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게으름을 피우며 허송세월 보내지 않으리라. 나에게는 나를 위한 해바라기가 아직도 무수히 많이 자라나고 있으며 결코 꺾이거나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자냉에게 작약이 있고 쿠스트에게 접시꽃이 있다면, 나에게는 해바라기가 있다_고흐
그러면 너는 무엇을 가지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