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탈을 쓰다
가셰 박사는 나의 정신병을 치유하려면 그림에 더 몰두하라고 말한다. 병을 낫게 하는 길이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니 더욱 반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터덜터덜 어둑어둑한 저녁에 길을 나선다. 사람의 시선이 없고 나를 어둠 속에 그대로 가두어 둘 수 있다. 그 공간에 홀로 서 있으면 들판의 맛 파람이 몸속을 타고 흐른다.
밖에 나가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풍경을 그대로 담을 수 있다. 캔버스를 펼치고 손가락에 붓을 잡으며 그림 속에 들어가 말을 하고 그림을 보면서 그 소리를 듣는다. 나의 내면의 소리를 누구에게 들키지 않고 고스란히 녹일 수 있다.
인생은 살아가는 여정이 늘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짙푸른 하늘만 바라보고도 행복을 느낄 수 있고 넓게 펼쳐진 노오란 밀밭을 그저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여도 기쁨이 배가 된다. 날개를 가졌다면 저 검은 까마귀 마냥 아무 근심 없이 그저 멀리 날 수 있을 것이다. 여인숙에서 빌린 총을 하늘을 향해 한발 쏘아대니 까마귀들이 놀라 나자빠진다. 그 커다란 울림의 총성에 놀라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고 하늘에 배설물을 뿌리면서 또다시 높게 날아간다. 그 생명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인간보다 더 강하다. 검은 까마귀처럼 휘 날고 싶다.
검은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색채를 강조하고 사물의 윤곽을 강하게 드러낼 수 있다. 온 마음을 다해 그림에 에너지를 쏟으니 신에게서 나에게 특별한 나만의 예술적 창조력을 내려주신다. 그 기술이 훗날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그림 속에 3개의 갈림길을 그려 놓았다. 잘 살아내는 것 아니면 죽음을 따르는 것, 삶과 죽음 그리고 나머지 1개의 갈림길을 무어라도 담아내야 한다. 그 나머지 갈림길은 희망이다. 복잡한 인생의 갈림길에 희망이 있어야 또다시 살아진다. 늘 내 편이 되어주고 보듬어주는 테오에게 가는 길, 늘 투닥거리고 잔소리를 쏟아부으며 엄격하고 근엄한 아버지에게 가는 길, 아버지의 기에 눌려 아무 말 없이 다정한 어머니에게 가는 길, 이제 조금 편히 쉬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나에 아픔이 조각조각 분해되도록 의자에 앉아 그들의 어깨 위에 나의 복잡한 심경을 살포시 놓아두고 싶다.
나는 오늘 아침 대성당에 많은 까마귀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곧 봄이 오고, 종달새가 돌아오겠지. 하느님은 땅의 표면을 새로이 한다.
보라, 나는 모든 사물을 새로이 한다. 그리고 신이 대지의 표면을 새롭게 하듯이, 사람의 영혼과 마음과 가슴에 힘을 불어넣고 새로이 할 수 있겠지._고흐
어떤 사물을 새롭게 하다. 새로이 하다. 너무 감성적이다. 어떤 사물을 보고 새롭게 하거나 무언가를 새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된다. 살아 움직이며 오늘을 사는 나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 끄적인다. 새로이 탄생하는 글 앞에 혼자 그림을 보며 감탄한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읽으며 고흐의 마음을 알아낸다. 만약 고흐가 옆에 있다면 나의 가벼운 어깨를 그에게 건네고 싶다. 그리고 조금 쉬었다 가도 늦지 않는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산다고 절대 뒤처지거나 내리막이 아니라는 말도 전하고 싶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 잘 해내고 있는 삶이다. 그저 그런 삶을 살아도 용서가 된다._채코